삼국시대~고려시대 : 512년~1392년
- 512년(신라 지증왕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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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신라 이찬 이사부(異斯夫), 우산국을 정벌함. 이후 우산국은 매년 신라에
토산물을 바침.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4, 신라본기(新羅本紀) 제4,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3년 ;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列傳) 제4, 이사부(異斯夫)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1, 기이(紀異) 1, 지철로왕(智哲老王)]
- 930년(고려 태조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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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우릉도(芋陵島)에서 사자(使者)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고려에 보내
방물을 바침. 백길을 정위(正位), 토두를
정조(正朝)에 임명.
[『고려사(高麗史)』 권 1, 「세가(世家)」 1]
- 1004년(목종 7, 관홍[寬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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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우릉도(芋陵島)인 11인, 일본 이나바[因幡, 현재의 돗토리현 동부 지역]에 표류.
우릉도 즉 울릉도를 우루마섬[우류마도(芋流麻島)]이라고 부름.
[『대일본사(大日本史)』 권234, 열전 5]
- 1018년(현종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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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우산국, 동북 여진족의 침입을 받아 농업이 폐해짐. 이원구(李元龜)를
보내 농기구를 하사.
[『고려사(高麗史)』권 4, 「세가(世家)」 4]
- 1019년(현종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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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우산국 민호(民戶) 가운데 여진의 침략을 받아 도망해온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냄.
[『고려사(高麗史)』권 4, 「세가(世家)」 4]
- 1022년(현종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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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여진의 침략을 받고 도망온 우산국인들을 예주(禮州[지금의 영덕])의 호적에
편입하고 음식 등을 공급.
[『고려사(高麗史)』권 4, 「세가(世家)」 4]
- 1032년(덕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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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우릉성주(羽陵城主)가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고려에 보내 토산물을
바침.
[『고려사(高麗史)』권 5, 「세가(世家)」 5]
- 1141년(인종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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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명주도감창사(溟州道監倉使) 이양실(李陽實)이 울릉도에 사람을 파견하여
과일, 나뭇잎, 특산물 등을 가져와 바침.
[『고려사(高麗史)』권 17, 「세가(世家)」 17]
- 1145년(인종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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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삼국사기』 편찬. 신라 지증왕 13년(512)의 우산국 복속 사실을 기록.
[『삼국사기』]
- 1157년(의종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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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동해 우릉도(羽陵島)에 사람이 살만하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감창전중내급사(溟州道監倉殿中內給事)
김유립(金柔立)을 파견하여 조사하게 함. 김유립이 돌아와, 섬의 크기, 촌락 터 등과 암석이 많아 사람이
살기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고려사(高麗史)』권 18, 「세가(世家)」 18]
- 1243년(고종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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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 동군민(東郡民)을 울릉도에 이주시켰으나 익사자가 많이 생겨 곧 철수.
[『고려사(高麗史)』권 제129, 「열전(列傳)」 제42, 반역(叛逆) 3, 최충헌(崔忠獻)[최이(崔怡)최항(崔沆)
최의(崔竩)]]
- 1246년(고종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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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국학의 학유 권형윤과 급제 사정순을 울릉도안무사(蔚陵島安撫使)에 임명.
[『고려사(高麗史)』권 23, 「세가(世家)」 23]
- 1259년(원종 즉위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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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울진 현령 박순(朴淳)이 울릉도(蔚陵島)로 도망가려다 성안 사람들에게
붙잡힘.
[『고려사(高麗史)』권 25, 「세가(世家)」 25]
- 1273년(원종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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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울릉도에 진기한 나무가 많다는 것이 알려져, 원나라가 목재를 요청하자 첨서
추밀원사 허공(許珙)을
울릉도작목사(蔚陵島斫木使)로 임명하여 이추(李樞)와 함께 가게 함.
[『고려사(高麗史)』권 27, 세가(世家)」 25 ; 『고려사(高麗史)』권 제130, 「열전(列傳)」 제43, 반역(叛逆) 4,
조이(趙彛)[김유(金裕) 이추(李樞)]]
- 1346년(충목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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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동계(東界) 우릉도인(芋陵島人)이 와서 조공함.
[『고려사(高麗史)』권 37, 「세가(世家)」 35]
- 1371년(공민왕 20)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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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군 환(永興君 環), 무릉도에 유배됨.
[『고려사(高麗史)』권 91, 「열전(列傳)」 4, 종실(宗室) 2, 양양공(襄陽公) 서(恕)]
- 1379년(우왕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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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왜(倭), 무릉도(武陵島)에 침입하여 15일간 머물다 감.
[『고려사(高麗史)』권 제134, 「열전(列傳)」 제47, 신우(辛禑)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