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 1392년~1598년[선조 32, 임진왜란 종료]

1403년(태종 3)
8월 11일왜가 강릉 임내(任內)·우계(羽溪)와 장기(長鬐) 등지에 침입하자, 무릉도 거주민을 육지로 내보내는 조치를 취함.
[『태종실록(太宗實錄)』s권 6]
1407년(태종 7, 응영[應永] 14)
3월 16일쓰시마도[對馬島] 수호(守護) 소 사다시게[宗貞茂], 사람을 보내 섬 안의 여러 부락 사람들을 데리고 무릉도에 옮겨 살기를 청함.
[『태종실록(太宗實錄)』권 13]
1412년(태종 12)
4월 15일강원도 고성군 어라진(於羅津)에 와서 정박한 유산국도인(流山國島人) 백가물(白加勿) 등 12명을 통주(通州,
통천[通川])·고성(高城)·간성(杆城) 등지에 나누어 둠.
[『태종실록(太宗實錄)』권 23]
1416년(태종 16)
9월 2일전강원도관찰사(前江原道觀察使) 호조참판 박습(朴習), 방지용(方之用)이란 자가 15호를 이끌고 무릉도에
들어갔는데 때로 왜인(倭人)으로 가장해 노략질을 한다고 아룀. 무릉도를 잘 아는 전만호(前萬戶) 김인우(金麟雨)를 무릉등처안무사(武陵等處安撫使)에, 섬에 다녀온 바 있는 삼척인(三陟人) 이만(李萬)을 반인(伴人)에 임명하여
울릉도에 살고 있는 거주민을 데려오게 함.
[『태종실록(太宗實錄)』권 32]
1417년(태종 17)
2월 5일무릉등처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에서 돌아옴. 대죽(大竹)․물소가죽․생저(生苧) 등의 토산물을 바치고, 거주민 3인을 데려옴. 섬안에 15호 남녀 86인이 살고 있다고 보고.
[『태종실록(太宗實錄)』권 33]
2월 8일태종, 우산·무릉도 거주민을 육지로 쇄환할 것인지를 논의하게 함. 대부분 거주민에게 5곡과 농기구를 지급하여
농업을 안정시키고 주수(主帥)를 파견하며 토공(土貢)을 바치게 하자고 주장했으나, 공조판서 황희(黃喜)의 건의를 받아들여 무릉도 거주민을 쇄환하기로 결정하고, 김인우를 다시 안무사에 임명, 파견하기로 함.
[『태종실록(太宗實錄)』권 33]
8월 6일왜적이 우산도(于山島)·무릉도(武陵島)에서 도둑질함.
[『태종실록(太宗實錄)』권 3]
1419년(세종 1)
4월 1일무릉도에서 나온 남녀 17명이 경기(京畿) 평구역리(平丘驛里)에 이르러 양식이 떨어졌다고 말함.
[『세종실록(世宗實錄)』권 3]
1423년(세종 5)
김을지(金乙之) 등 28명이 무릉도로 도망감.
[『세종실록(世宗實錄)』권 29, 세종 7년(1425) 8월 8일]
1425년(세종 7)
5월김을지 등 7명이 평해군(平海郡) 구미포(仇彌浦)에 잠입했다가 체포됨.
[『세종실록(世宗實錄)』권 29, 세종 7년(1425) 8월 8일(갑술)]
8월 8일무릉도에 남은 거주민을 쇄환하기 위해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于山武陵等處安撫使)에 임명·파견함.
수군 46명이 탄 배 1척이 풍랑을 만나 실종됨.
[『세종실록(世宗實錄)』권 29]
10월 20일우산·무릉등처안무사 김인우, 돌아와 복명함. 역(役)을 피해 도망갔던 무릉도의 남녀 20명을 찾아 데려옴.
[『세종실록(世宗實錄)』권 30]
11월 20일무릉도 입항 때 배가 파선되어 죽은 강원도 수군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냄.
『세종실록(世宗實錄)』권 30]
12월 28일우산·무릉등처안무사 김인우를 수행했다가 실종된 46인 가운데 장을부(張乙夫) 등 10명이 일본에서 돌아옴.
[『세종실록(世宗實錄)』권 30]
1430년(세종 12)
1월 26일봉상시 윤(奉常寺尹) 이안경(李安敬)이 요도(蓼島)를 방문하고 돌아오니, 함길도 관찰사에게 요도(蓼島)를
다녀왔다는 김남련(金南連)을 서울로 올려 보내되, 늙거나 병들었으면 섬의 사정을 물어서 보고하게 함.
[『세종실록(世宗實錄)』권 47]
4월 4일함길도 감사에게 요도(蓼島)의 지형과 뱃길을 조사해 아뢰게 함.
[『세종실록(世宗實錄)』권 48]
4월 5일상호군(上護軍) 홍사석(洪師錫)을 강원도에 보내 요도(蓼島)에 대해 찾아 물어보게 함.
[『세종실록(世宗實錄)』권 48]
4월 7일전농군(典農軍) 신인손(辛引孫)을 강원도에 보내 요도(蓼島)에 대해 찾아 물어보게 함.
[『세종실록(世宗實錄)』권 48]
10월 23일강원도와 함길도 감사에게 요도(蓼島)의 정확한 위치를 조사할 것을 교지함.
[『세종실록(世宗實錄)』권 50]
1432년(세종 14)
1월 19일『신찬 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세종실록』 「지리지」) 편찬.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무릉(于山武陵) 두 섬이 현(縣)의 정동(正東) 바다 가운데 있다[두 섬은 서로 떨어진 것이 멀지 않아 풍일(風日)이 청명하면 서로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됨.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
1436년(세종 18)
(윤)6월 19일강원도관찰사 유계문(柳季聞), 무릉도에 왜가 침입할 우려가 있으므로 현(縣)을 설치하여 민(民)을 옮기자는 장계를 올림. 왕은 현을 설치하고 민을 옮기는 것은 곤란하므로 매년 관리를 보내 섬 안을 탐사하고 토산물을 채집하며,
마장(馬場)을 설치하여 왜의 점거를 막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면서, 만약 관리를 파견할 경우 그 시기, 장비, 선박 수 등을 조사·보고할 것을 지시.
[『세종실록(世宗實錄)』권 73]
1437년(세종 19)
2월 8일강원 감사에게 무릉도(茂陵島)에 침략하는 왜노(倭奴)에 대비할 것을 명함.
[『세종실록(世宗實錄)』권 76]
1438년(세종 20)
4월 21일도망가 숨은 인구(人口)의 수색·검문을 겸하여, 전호군(前護軍) 남회(南薈), 전부사직(前副司直) 조민(曺敏)을
순심경차관(巡審敬差官)에 임명하여 무릉도로 파견.
[『세종실록(世宗實錄)』권 81]
7월 15일무릉도에 파견된 경차관 남회․조민 등이 돌아와 복명함. 남녀 66인을 체포해 데려왔고, 사철(沙鐵)·석종유(石鍾乳)·생포(生鮑)·대죽(大竹) 등의 토산물을 바침.
[『세종실록(世宗實錄)』권 82]
7월 26일강원도관찰사에게 양양(襄陽)의 동쪽 바다에 있는 요도(蓼島)를 탐문할 것을 지시.
[『세종실록(世宗實錄)』권 82]
11월 25일무릉도에 들어가 살다가 경차관 남회 등에게 잡혀온 사람들을 ‘본국(本國)을 모배(謀背)한 죄’로 국문(鞠問)하여,
모반의 주동한 죄인 김안(金安)을 교형(絞刑)에 처하고 그 밖의 죄인들은 모두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이주하도록
결정.
[『세종실록(世宗實錄)』권 83]
1439년(세종 21)
2월 7일무릉도에 들어가 산 김범(金凡)·귀생(貴生) 등을 교형(絞刑)에 처함.
[『세종실록(世宗實錄)』 권 84]
1441년(세종 23)
7월 14일함길도관찰사·도절제사에게 새 땅 요도(蓼島)를 탐문할 것을 지시.
[『세종실록(世宗實錄)』권 93]
1445년(세종 27)
6월 12일강원도관찰사에게 요도를 탐문할 것을 지시.
[『세종실록(世宗實錄)』권 108]
8월 17일강원도관찰사에게 요도를 발견한 자에 대한 포상 조건을 알리고, 이러한 사실을 관내에 널리 알리게 함.
[『세종실록(世宗實錄)』권 109]
1451년(문종1)
8월 25일『고려사』편찬. 「지리지」, 동계(東界), 울진현조에 울릉도·독도에 관해 기록.
[『문종실록(文宗實錄)』권 9]
1457년(세조 3)
4월 16일전중추원부사(前中樞院副使) 유수강(柳守剛), 우산·무릉 두 섬에 읍을 설치할 것 등을 상서하여 건의했으나, 병조의 요청에 따라 윤허하지 않고, 단지 두 섬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을 쇄환하지 말도록 지시.
[『세조실록(世祖實錄)』권 7]
1470년 (성종 1)
12월 11일영안도관찰사(永安島觀察使) 이계손(李繼孫)에게 삼봉도(三峯島)로 도망간 자들을 탐문·보고할 것을 지시.
[『성종실록(成宗實錄)』권 8]
1471년 (성종 2)
5월경성(鏡城)의 김한경(金漢京) 등 2인이 삼봉도(三峰島)에 표박(漂泊)하여 섬사람들과 서로 만났음.
[『성종실록(成宗實錄)』권 68, 성종 7년(1476) 6월 22일]
8월 17일강원도관찰사 성순조(成順祖)에게 무릉도로 숨어들어간 자들을 찾아 체포할 준비를 지시.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1]
1472년 (성종 3)
2월 3일병조에서 삼봉도수멱절목(三峯島搜覓節目)을 마련하여 보고.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5]
3월 6일인정전에서 실시한 책문[策問, 정치에 대한 계책을 묻는 문제] 과거 시험에서 삼봉도 관리정책을 문제로 출제.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6]
3월 20일삼봉도경차관(三峯島敬差官) 박종원(朴宗元)에게 저포 철릭(苧布帖裏) 등을 내려주고, 삼봉도 경차관의 행차에
왜 통사(倭通事)와 여진 통사(女眞通事) 1인씩을 파견함.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6]
4월 1일삼봉도경차관(三峯島敬差官) 박종원(朴宗元)이 삼봉도로 떠나기 전에 하직을 하니, 교지를 내려 당부함.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7]
6월 12일강원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경차관 박원종 등의 삼봉도 탐사 결과를 보고. 박원종이 탄 선박은 무릉도 앞 15리까지 갔다가 바람에 밀려 간성(杆城) 청간진(淸簡津)으로 돌아왔고, 사직(司直) 곽영강(郭永江) 등이 탄 3척이 무릉도에 도착하여 3일 동안 수색했으나 사람은 찾지 못하고 대나무를 베어 강릉 우계현(羽溪縣) 오이진(梧耳津)으로
돌아왔다고 함.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9]
8월 12일병조에서 삼봉도(三峯島)를 수색할 일의 조목을 의논하여 아룀.
[『성종실록(成宗實錄)』권 21]
1473년 (성종 4)
1월 9일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 정난종(鄭蘭宗)에게 무릉도(茂陵島)․요도(蓼島)를 조사할 것을 명함.
[『성종실록(成宗實錄)』권 26]
1475년 (성종 6)
5월경차관 박종원을 수행했던 김한경(金漢京)이, 영안도민(永安道民) 5∼6명과 함께 경원(慶源) 지방의
말응대진(末應大津)에서 배로 3일 동안 가서 삼봉도(三蓬島)를 보았는데, 섬 가운데 7∼8인이 있었으나, 상륙하지 못하고 돌아옴.
[『성종실록(成宗實錄)』권 64, 성종 7년(1476,) 2월 8일]
1476년(성종 7)
2월 8일김한경 등이 삼봉도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보고한 종성(鍾城)의 친군위(親軍衛) 노의순(盧義順)에게 좀 더
상세하게 물어보도록,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 이극균(李克均)에게 글을 내림.
[『성종실록(成宗實錄)』권 64]
6월 22일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 이극균(李克均)에게, 김한경 등과 믿을만한 사람 3인을 보내 삼봉도를 수색하게 함.
[『성종실록(成宗實錄)』권 68]
9월 16일영안도관찰사의 지시로, 김자주(金自周)·김흥(金興)·김한경(金漢京) 등 12인이 배 5척을 타고 경성(鏡城)
옹구미(甕仇未)에서 출발하여, 25일에 삼봉도 근처에 이르렀으나, 바다 섬 사이에 사람 모양의 형체 30여 명을 보고 두려워 상륙하지 못한 채 섬 모양만 그려옴.
[『성종실록(成宗實錄)』권 72, 성종 7년(1476) 10월 22일·27일조]
10월 22일삼봉도 그림을 그려 바친 영흥 사람 김자주에게 옷 두벌을 내려줌.
[『성종실록(成宗實錄)』권 72]
10월 27일병조의 계청(啓請)으로, 이듬해(1477) 4월 관원을 파견하여 삼봉도를 찾자는 결정을 내림.
[『성종실록(成宗實錄)』권 72]
1479년 (성종 10)
3월 4일좌랑(佐郞) 이창신(李昌臣)이 영안도(永安道)의 인심이 흉흉하므로 삼봉도(三峯島)는 버려두자고 건의했으나, 왕은 삼봉도를 지금 찾지 않으면 죄 짓고 도망간 사람들의 소굴이 될 것이므로 버릴 수 없다고 말함.
[『성종실록(成宗實錄)』권 78]
5월 12일병조, 영안도관찰사의 계본(啓本)에 따라 관원을 삼봉도에 파견하여 거주민을 쇄환할 것을 청함. 대신들, 거주민이
있는지 알아본 뒤 다시 논의하자고 건의.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04]
8월 30일삼봉도에 역(役)을 피해 도망간 백성이 천 여 명이라는 보고를 받고, 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 이덕량(李德良)·남도절도사(南道節度使) 이흠석(李欽石)·북도절도사(北道節度使) 신주(辛鑄)에게 명하여 삼봉도를 토벌할 것을 명함.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07]
9월 5일삼봉도 토벌에 사용할 전함의 건조를 감독하고 거주민을 무마하여 쇄환해야할 임무가 있는
영안도경차관(永安道敬差官)에 조위(曺偉)를 임명.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08]
9월 12일영안도 경차관(永安道敬差官) 조위(曺偉)가 가지고 갈 사목(事目)을 내림. 쇄환한 거주민의 심문에 대한 내용 등이 있음.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08]
10월 27일경차관 조위, 삼봉도에 보낼 김한경 등 32명을 모집, 3척의 배에 나누어 태우고 엄근(嚴謹)·김자주(金自周)·
김여강(金麗强)을 각 배의 패두(牌頭)로 삼은 뒤 부령(富寧) 남면(南面) 해변에서 삼봉도로 출발.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09, 성종 10년(1479) 10월 30일]
12월김한경 등 역풍으로 삼봉도행을 포기. 김한경과 세 명의 패두는 한성으로 잡혀가 병조의 국문을 받음.
1480년 (성종 11)
2월 24일삼봉도 초무사(三峯島抄撫使)의 직책을 면하려고 꾀한 정석희(鄭錫禧)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창원으로
부처(付處)함.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14]
2월 28일병을 핑계로 삼봉도 초무사를 면하려 한 박종원(朴宗元)의 직첩을 거두고 김해에 부처(付處)함.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14]
2월삼봉도초무사(三峯島抄撫使) 파견을 다시 계획하여, 심안인(沈安仁)을 초무사에, 성건(成健)을 부사(副使)에 임명.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15, 성종 11년(1480) 3월 8일]
3월 17일삼봉도 초무사(三峯島招撫使) 심안인(沈安仁)이 삼봉도로 떠나기 전 하직 인사를 하자 교서(敎書)를 내림.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15]
5월 30일삼봉도초무사 심안인 일행, 석방된 김한경 등과 합류하여 9척의 배로 삼봉도로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장마가
시작되고 풍수(風水)가 순조롭지 않아 삼봉도 행차를 정지하고 올라오라고 교시.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17]
1481년 (성종 12)
1월 9일영안도 관찰사 이극돈(李克敦)의 건의에 따라 다시 삼봉도(三峯島)를 수색하여 얻는 계책[搜得策]을 결정했으나,
실현되지 못한 듯함.
[『성종실록(成宗實錄)』권 125]
1486년 (성종 17)
12월『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완성.
1511년 (중종 6)
5월 21일강원도 관찰사에게 무릉도를 살펴보게 함.
[『중종실록(中宗實錄)』권 13]
1530년 (중종 25)
8월『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완성.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 관련 기사 기재. 「팔도총도」에 우산도 표기.
[『신증동국여지승람』]
1511년 (중종 6)
5월 21일선위사(宣慰使) 허굉(許硡), 무릉도(武陵島)에서 불빛이 보이는데 숨어 있는 왜선(倭船)인지 죄를 짓고 도망간
조선 사람들인지 알 수 없다는 영해(寧海) 군관(軍官) 박자범(朴自範)의 보고를 아룀.
[『중종실록(中宗實錄)』권 13]
1592년 (선조 25)
4월 14일임진왜란 일어남.
1598년 (선조 31)
11월일본군 철수. 임진왜란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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