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고종 13, '조일수호조규‘ 조인]~1897년[광무 1, 대한제국 수립]
- 1876년 (고종 13, 명치[明治] 9)
- 2월 2일‘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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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일본 아오모리현[靑森縣]의 무토 헤이가쿠[武藤平學],
「송도개척지의(松島開拓之義)」를 외무성에 제출.
'송도' 즉 울릉도의 거목을 벌채하여 블라디보스톡에 수출하거나 시모노세키에 보내 판매할 계획을 밝힘.
[「송도개척지의(松島開拓之義)」] -
7월 13일일본 고다마 사다아키[兒玉貞陽], 「송도개척원(松島開拓願)」를
외무성에 제출. ‘송도’는 울릉도를 가리킴.
[「송도개척원(松島開拓願)」] - 10월 5일일본 내무성 지리료(地理寮), 시마네현[島根縣] 앞으로 ‘죽도[竹島, 울릉도]’의 소속에 관한 질의서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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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일본해[日本海, 동해] 내(內)
죽도[竹島, 울릉도] 외(外) 일도[一島, 송도[松島], 독도]
지적(地籍) 편찬(編纂) 방사(方伺)」를 태정관(太政官)에 제출하여 두 섬의 소속에 대한 판단을 요청.
[「일본해내죽도외일도지적편찬방사(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 -
12월 19일일본 지바현[千葉縣]의 사이토 시치로베[齋藤七郞兵衛],
「송도개도원서 및 건언(松島開島願書幷建言)」을
외무성에 제출.
[「송도개도원서 및 건언(松島開島願書幷建言)」] -
이 해일본 해군, 「조선동해안도(朝鮮東海岸圖)」 제작. 1857년 러시아
해군이 제작한 지도를 저본으로 하여 다시 발행한 작전 지도. 독도를 원 경위도에서 떼어내 울릉도 아래 안쪽으로 옮겨
기재하여 조선의 영토로 표기.
[「조선동해안도(朝鮮東海岸圖)」]
- 1877년 (고종 14, 명치[明治]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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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7일(양력)일본 시마네현의 사족(士族) 도다 다카요시[戶田敬義],
「죽도도해지원[竹島渡海之願] 제출.
[『공문록(公文錄)』 「내무성지부(內務省之部)」 1] -
3월 17일(양력)일본 내무성, 「일본해[日本海, 동해] 내(內) 죽도[竹島,
울릉도] 외(外) 일도(一島, 송도[松島], 독도) 지적(地籍)
편찬(編纂) 방사(方伺)」를 태정관(太政官)에 제출하여 두 섬의 소속에 대한 최종 결정을 요청.
[『공문록(公文錄)』 「내무성지부(內務省之部)」 1] -
3월 29일(양력)일본 태정관(太政官)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지적(地籍) 편찬 상 문제가 된
‘죽도[竹島, 울릉도]’와 ‘외(外) 일도[一島, 송도(松島),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님을 내무성에 지령.
[『공문록(公文錄)』 「내무성지부(內務省之部)」 1] -
4월 9일(양력)일본 내무성, 태정관의 결정을 시마네 현에 지령.
[『공문록(公文錄)』 「내무성지부(內務省之部)」 1]
- 1878년 (고종 15, 명치[明治] 11)
-
8월 15일(양력)일본 시모무라 린하치로[下村輪八郞]와 사이토
시치로베[齋藤七郞兵衛], 「송도개척원(松島開拓願)」을
외무성에 제출.
[「송도개척원(松島開拓願)」]
- 1880년 (고종 17, 명치[明治]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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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양력)일본 군함 아마기[天城]호를 보내 섬 이름에 혼란을 빚고 있는
‘송도(松島)’를 조사. 조사 결과, ‘송도(松島)’를
울릉도로, ‘죽도(竹島)’를 울릉도 옆의 죽서도[竹嶼島, 죽도(竹島)]로 판단.
[수로잡지(水路雜誌)]
- 1881년 (고종 18, 명치[明治]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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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강원도 관찰사 임한수(林翰洙), 울릉도 수토관(搜討官)이 울릉도에서
벌목 중인 일본인 7명을 적발했음을 장계하여 보고. 이후 통리기무아문의 계청에 따라 예조판서 심순택, 일본 외무성에
서계를 보내 울릉도에서 벌목 중인 일본인과 그 선박의 철수를 요청.
[『고종실록(高宗實錄)』권 18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
8월 20일(양력)일본 외무성 기타자와 마사노부[北澤正誠], 한국·일본·중국의
문헌과 군함 아마기[天城]의 현지 조사 결과를
검토하여 『죽도고증(竹島考證)』상·중·하 3권을 편찬. ‘송도[松島]’는 울릉도로서 일본 판도 밖에 있는 땅임을
밝힘. 그 요약문 「죽도판도소속고(竹島版圖所屬考)」를 외무성에 제출.
[『죽도고증(竹島考證)』상·중·하, 「죽도판도소속고(竹島版圖所屬考)」] -
8월 27일일본 외무성 대리 우에노 가게노리[上野景範], 예조판서 심순택에게
8월 20일자 회답서계를 보냄. 울릉도에서의
일본인의 벌목은 듣지 못했던 일이므로 사실을 조사, 조처하여 양국 우의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을 약속. - 12월 15일주조선일본공사관 사무서리 소에다 다카시[副田節], 통리기무아문사 이재면(李載冕)에게 서함을 보냄. 울릉도에서 벌목한 사실은 있으나 현재 일본인은 모두 철수했다고 알림.
- 1882년 (고종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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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울릉도검찰사 이규원(李奎遠), 울릉도로 가기 전에 고종을 알현하고
하직 인사.
[『고종실록(高宗實錄)』권 19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4월 29일이규원 일행, 강원도 평해군(平海郡) 구산포(邱山浦)를 출발,
울릉도로 향함. 총인원 102명, 선박 3척.
[『울릉도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 -
4월 30일이규원 일행, 울릉도 서쪽 소황토구미(小黃土邱尾)에 도착.
[『울릉도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 -
5월 11일이규원 일행, 울릉도 출발.
[『울릉도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 -
5월 12일이규원 일행, 강원도 평해군 구산포 도착.
[『울릉도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 -
5월 27일이규원 일행, 한양 도착.
[『울릉도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 -
6월 5일이규원, 서계(書啓)·별단(別單) 등을 올리고 복명. 울릉도 거주민
현황과 일본인의 벌목 상황 등을 보고하고
울릉도 개척과 일본 정부에 항의할 것 등을 건의.
[『고종실록(高宗實錄)』권 19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6월 16일예조판서 이회정(李會正), 일본 외무성에 서계를 보내 일본들이
울릉도에서 무단 벌목하지 못하도록 청함.
[『고종실록(高宗實錄)』권 19] -
8월 20일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이 상주한 울릉도 개척 방침을 확정.
[『고종실록(高宗實錄)』권 19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8월 말경울릉도도장(鬱陵島島長))에 전석규(全錫奎)를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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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일본에 체류 중인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일본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울릉도에서의 일본인의 무단 벌목을 항의.
(『수신사기록(修信使記錄)』 「사화기략(使和記略)」 고종 19년 9월 22일) - 10월 경울릉도 개척 사업을 주관할 지방관으로 평해군수(平海郡守)를 위촉.
- 1883년 (고종 20,명치[明治]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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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9일주조선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예조판서
이병문(李秉文)에게 일본인의 울릉도에서의
벌목 금지를 약속.
[『일본외교문서』 15, 「사항(事項)」 10, 문서번호 159] -
3월 1일일본 태정대신(太政大臣) 산죠 시네토미[三條實美],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금지령을 내림
[「조선국(朝鮮國) 울릉도(鬱陵島)로의 일본인(日本人) 도항금지(渡航禁止) 건(件)」] -
3월 16일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겸포경등사(東南諸島開拓使兼捕鯨等事)에 임명.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4월일본 해군성 수로국(水路局), 『환영수로지(寰灜水路志)』
제2권(노한편[露韓篇]) 간행. 제2권
「조선국일반정세(조선국일반정세)」에서 ‘송도[松島, 울릉도]’와 함께 리앙쿠르암[독도]을 서술함으로써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밝힘.
[『환영수로지(寰灜水路志)』] -
7월강원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원주목사 남○○, 울릉도 이주민을
조사 보고. 4월 경 울릉도에 내륙인 약
30명 이주. 2차로 약 20명 이주. 7월 현재 총 이주민 수는 16호(戶) 54명.
[「광서구년 사월 일 울릉도개척시 선격양미잡곡용입가량성책(光緖九年四月日鬱陵島開拓時船格粮米雜物容入假量成冊)」 ; 「광서구년 칠월 일 강원도울릉도 신입민호인구 성명년세급전토기간 수효성책(光緖九年七月日江原道鬱陵島新入民戶人口姓名年歲及田土起墾數爻成冊)」] -
10월 14일(양력)울릉도 잔류 일본인 255명, 일본 내무성이 보낸 선박
에치고마루[越後丸] 편으로 철수.
[『일본외교문서』16, 「사항(事項)」 10, 문서번호 130·131·133] -
12월 초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 수원(隨員) 탁정식(卓挺埴), 일본
선박 덴쥬마루[天壽丸]의 울릉도 목재 밀반출[덴쥬마루사건]을 확인.
[『선린시말(善隣始末)』, 부록 「죽도시말(竹島始末)」]
- 1884년 (고종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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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울릉도장 전석규, 덴주마루[天壽丸]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영목(閔泳穆), 일본서리공사 시마무라 히사시[島村久]에게 덴주마루 사건을 항의.
[『고종실록(高宗實錄)』권 21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3월 15일울릉도 관수(管守)의 직명을 울릉도첨사(鬱陵島僉使)로 정하고
삼척영장(三陟營將)이 겸하게 함.
[『고종실록(高宗實錄)』권 21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일성록(日省錄)』] -
6월 22일「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성립. 장정 41호, 일본인의
전라·경상·강원·함경 4도 해빈(海濱, 근해)에서의 어업 허가. 일본인어채범죄조규(日本人魚採犯罪條規) 성립.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
6월 30일울릉도첨사를 평해군수가 겸하게 함.
[『고종실록(고종실록)』권 21 ; 『일성록(日省錄)』] -
12월 17일해방총관(海防總管) 이규원(李奎遠)을 동남개척사(東南開拓使)에
임명.
[『고종실록(고종실록)』권 21]
- 1885년 (고종 22)
-
4월 6일전권부대신 묄렌돌프(Möllendorff, Paul George
von), 일본 선박 반리마루[萬里丸]의 울릉도 목재
‘도탈(盜奪)’[반리마루사건]을 일본 외무성에 항의하고 압류 요청.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일안(日案) 1, 문서번호 479·7480·597·732·866·885·886 ;
『일본외교문서』18, 사항(事項) 7 ; 『일본외교문서』19, 사항(事項) 6]
- 1886년 (고종 23,명치[明治] 19)
-
6월 12일일본 정부, 울릉도 목재를 밀반출한 무라카미 도쿠하치[村上德八]에게
벌금 부과하고 그 벌금과 목재 공매 대금을
보내옴으로써 반리마루[萬里丸] 사건 종결.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일안(日案) 1, 문서번호 207·277·278·293·316·438·604·702 ;
『선린시말(善隣始末)』, 부록 「죽도시말(竹島始末)」]
- 1888년 (고종 25,명치[明治] 21)
-
2월 6일울릉도첨사를 도장(島長)으로 바꾸어 평해군(平海郡) 소속
월송포수군만호(越松浦水軍萬戶)가 겸하게 함. 종래의 도장은 가도장(假島長) 또는 도수(島守)로 호칭.
[『고종실록(고종실록)』권 25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고종 25년 2월 7일 ; 『일성록(日省錄)』고종 25년 2월 7일] -
가을일본 어민들이 울릉도 연안에 출몰하기 시작. 가족을 거느린 일본인 시로미즈
기치베[白水吉兵衛]가 울릉도
입적(入籍)을 원함.
[「강원도관초(江原道官草)」(규장각소장) 무자(戊子, 1888년) 7월 10일·11월 9일·12월 24일, 기축(己丑, 1889년) 5월 6일 ; 『통서일기(統署日記)』 2(『구한국외교관계부속문서』), 8쪽 ; 「강원도관초」 무자 11월 28일·기축 8월 6일]
- 1889년 (고종 26,명치[明治] 22)
-
여름일본 어선단 24척, 어부 186명, 울릉도에 들어와 곡물 절취,
관고(官庫)와 민가(民家) 파괴 등 큰 소요 일으킴.
[「강원도관초(江原道官草)」 무자(戊子, 1888년) 5월 28일·7월 17·25일·8월 6·11일 ;『통서일기(統署日記)』 2(『구한국외교관계부속문서』), 133·163·174·197·232쪽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일안(日案) 2, 문서번호 1510] -
9월 19일독판교섭통상사무 민종묵(閔種默), 일본 공사관에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에서의 불법행위를 항의하고 그 처벌과
배상을 요구.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일안(日案) 2, 문서번호 1510] -
10월 20일조일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 성립. 장정 22조, 어업허가증을 가진
일본 어선은 전라·경상·강원·함경 4도
근해에서의 어업을 허가.
[『고종실록(고종실록)』권 26] -
일본대리공사 곤도 신수케[近藤眞鋤],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종묵에게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에서의
불법 행위를 부산·원산영사에게 조사·처리하도록 지시하였음을 알려옴.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일안(日案) 2, 문서번호 1523] - 연말~1890년 초영의정 심순택의 건의에 따라 쥐떼의 피해를 크게 입은 울릉도 에 삼척·울진·평해 3읍의 환곡 중 3백석을 지급.
- 1890년 (고종 27,명치[明治] 23)
-
(윤)2월 18일국왕, 강원도관찰사 이원일(李源逸)을 불러 보고, 울릉도
검찰을 각별히 당부
[『고종실록(고종실록)』권 27] -
4월울릉도민, 태하동(台霞洞)에
「영의정심공순택휼진영세불망비(領議政沈公舜澤恤賑永世不忘碑)」를 세움.
[「영의정심공순택휼진영세불망비(領議政沈公舜澤恤賑永世不忘碑)」]
- 1891년 (고종 28,명치[明治] 24)
-
일본인의 울릉도 잠입이 다시 시작됨.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국사편찬위원회소장), ‘각영사기밀래신(各領事機密來信)'
(明治 33년, 1900), 부산영사관 기밀 제17호(명치 33년 6월 12일)]
- 1892년 (고종 29,명치[明治] 25)
- 선전관(宣傳官) 윤시병(尹始炳)을 검찰관(檢察官)에 임명하여 울릉도에 파견.
-
이해일본 해군, 이해부터 순차적으로 『일본수로지(日本水路誌)』간행. 독도는
수록하지 않음.
[『일본수로지(日本水路誌)』]
- 1893년 (고종 30)
-
11월 9일평해군수(平海郡守) 조종성(趙鍾成)을 울릉도사검관(鬱陵島査檢官)에
임명, 울릉도에 파견.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일성록(日省錄)』]
- 1894년 (고종 31,명치[明治] 28)
- 1월 7일울릉도 이배(吏輩)·교배(校輩) 배치를 폐지하라고 평해군·울릉도에 지령.
- 6월 23일일본 해군, 서해 풍도(豊島) 해상의 청나라 군함 제원(濟遠)·광을(廣乙) 공격. 청일전쟁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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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7일울릉도가 개척되었으므로, 수토에 필요한 자원 조달을 위해 마련된
「울릉도수토선격십물(鬱陵島搜討船格什物)」을 영구히 격파.
[『고종실록(高宗實錄)』권 32 ; 『관보(官報)』 개국(開國) 503년(1894) 12월 27일] -
이해일본 해군,『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간행. 울릉도·독도를 수록.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
- 1895년 (고종 32,명치[明治]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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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월송만호(越松萬戶)가 겸하고 있던 울릉도 도장(島長)을 별도로
임명. 매년 수차례 배를 보내 도민(島民)의
질고(疾苦)를 살피게 함.
[『고종실록(高宗實錄)』권 33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일성록(日省錄)』;『관보(官報)』개국(開國) 504년(1895) 1월 29일] - 3월 23일 청일전쟁 종결, 시모노세키[下關]조약 성립.
-
8월 16일울릉도 도장(島長)을 도감(島監)으로 바꿈.
[『고종실록(高宗實錄)』권 33] -
9월 20일울릉도 도감에 배계주(裵季周) 임명.
[『관보(官報)』개국(開國) 504年(1895) 9월 20일]
- 1896년(건양 1,명치[明治]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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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경울릉도 도감 배계주, 울릉도의 현황을 조사하여 보고.
12동리(洞里), 가호(家戶) 397호, 인구 1,134명[남 662, 여 472], 개간된 농경지 4,774.9 두락.
[「독립신문」 1897년 4월 8일자 ‘외방통신’] -
9월 9일울릉도 및 압록강·두만강 유역 삼림 벌채권을 러시아인
부린너(Brynner, Y. I.)에게 특허.
[『고종실록(高宗實錄)』권 34] -
이해울릉도에 잠입한 일본인 수가 200명 내외 유지. 대부분 벌목에 종사.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국사편찬위원회소장), ‘각영사기밀래신(各領事機密來信)'
(明治 33년, 1900), 부산영사관 기밀 제17호(명치 33년 6월 12일)]
- 1897년 (광무 1,명치[明治] 31)
- 10월 10일대한제국 성립.
1897년[광무 1, 대한제국 수립]~1910년(융희 4, ‘한일합병조약’ 체결]
- 1898년 (광무 2,명치[明治]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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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칙령(勅令) 제12호로, 1896년(건양 원년) 칙령 제36로
제정된 지방 관제(地方官制) 개정. 울릉도에 도감(島監)을
설치하고 판임관으로 대우하도록 함.
[『고종실록(高宗實錄)』권 37 ; 『관보(官報)』제962호 광무(光武) 2년 5월 30일] -
연말울릉도도감 배계주, 밀반출된 목재를 찾고자 일본 오키[殷岐]·도쿄 등지에서
재판.
[『외아문일기(外衙門日記)』광무 2년(1898) 10월 8·11·12일, 광무 3년(1899) 4월 25일 ; 『일본외교문서』32, 사항(事項) 9, 문서번호 165 ; 『황성신문(皇城新聞)』광무 3년 2월 6일·4월 26일·5월 16일 ;
「내부거래안(內部去來案) 7(광무 3년)]
- 1899년 (광무 3,명치[明治] 32)
-
연초울릉도도감 배계주, 밀반출된 목재를 찾고자 일본 시마네 현
마쓰에[松江]에서 재판.
[『황성신문(皇城新聞)』1899년 5월 16일 「雜報」 ‘가임일우(加任一隅)’] -
6월 하순일본인들의 무단 벌목·밀반출을 조사하기 위해 배계주와
부산해관세무사서리 라포테(Laporte, F.) 등을 울릉도에
파견.
[『황성신문(皇城新聞)』1899년 9월 16일 「雜報」 ‘울도일인(鬱島日人)’] -
7월라포테 등 울릉도에서 돌아와 2백 여 명의 일본인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고,
목재 밀반출, 상품 밀매를 하며, 그 뜻을
거스르면 난폭한 행동을 한다는 요지의 보고서 제출.
[『내부거래안(內部去來案)』7(광무 3년), 조회(照會) 제13호 ; 『외아문일기(外衙門日記)』광무 3년(1899) 9월 16일] -
8월 초주일러시아공사, 일본 정부에 일본인의 울릉도에서의 벌목에 항의하며 벌목
금지를 요청.
[『외아문일기(外衙門日記)』광무 3년(1899) 8월 16일 ;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일안(日案)」 4, 문서번호 5261 ; 『일본외교문서』32, 사항(事項) 9, 문서번호 166·168] -
8월 3일·15일주한러시아공사, 한국 정부에 일본인의 울릉도에서의 벌목을
항의.
[『구한국외교관계부속문서(舊韓國外交關係附屬文書)』, 「교섭국일기(交涉國日記)」, 광무 3년(1899) 8월 8일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18, 「아안(俄案)」 2, 문서번호 1429·1433·1434·1460·1469] -
8월 21일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수케[林權助],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에게 러시아의 울릉도 삼림 벌채권을
존중하되 일본 정부의 권리를 유보할 것임을 알림.
[『외아문일기(外衙門日記)』광무 3년(1899) 8월 21일 ;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일안(日案)」 4, 문서번호 5273] -
9월 16일외부대신 박제순, 일본공사에게 울릉도 재류(在留) 일본인의 철수를
요구.
[『외아문일기(外衙門日記)』광무 3년(1899) 9월 16일 ;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일안(日案)」 4, 문서번호 5322] -
10월 2일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수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울릉도 재류(在留)
일본인의 철수를 약속.
[『외아문일기(外衙門日記)』광무 3년(1899) 9월 21·22일·10월 3일 ;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일안(日案)」 4, 문서번호 5323·5337] -
10월 11일주한러시아공사, 한국 정부에 일본인의 울릉도에서의 벌목을 항의.
[『구한국외교관계부속문서(舊韓國外交關係附屬文書)』, 「교섭국일기(交涉國日記)」, 광무 3년(1899)
10월 17일 ; 『외아문일기(外衙門日記)』광무 3년(1899) 10월 12일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18, 「아안(俄案)」 2, 문서번호 1429·1433·1434·1460·1469] -
10월 25일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수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울릉도
재류(在留) 일본인의 철수가 그 주거권(住居權)과 관계가 없음을 밝힘.
[『외아문일기(外衙門日記)』광무 3년(1899) 10월 26일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일안(日案)」 4, 문서번호 5383] -
12월 15일내부시찰관(內部視察官) 우용정(禹用鼎)을 울릉도
시찰위원(視察委員)에 임명.
[고종실록(高宗實錄) ;『관보(官報)』제1448호 광무(光武) 3년(1899) 12월 19일 ;『일성록(日省錄)』광무 3년 11월 13일(음력)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광모 3년 11월 13일] -
이해일본 해군,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간행. 울릉도·독도를 수록.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
- 1900년 (광무 4,명치[明治] 33)
-
연초울릉도 도감 배계주,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이 저지른 작페(作弊)를 보고.
[『내부거래안(內部去來案)』 8(광무 4년), 조회(照會) 제6호 ;
『구한국외교관계부속문서(舊韓國外交關係附屬文書)』, 「교섭국일기(交涉國日記)」, 광무 4년(1900) 3월 15일] -
3월 16일외부대신 박제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울릉도 일본인의 작페를
항의하고 조속한 철수를 요청.
[『구한국외교관계부속문서(舊韓國外交關係附屬文書)』, 「교섭국일기(交涉國日記)」,광무 4년(1900) 3월 16일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일안(日案)」 4, 문서번호 5566] -
3월 23일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울릉도 재류
일본인의 비행을 공동조사할 것을 요청하고 일본인의 왕래 거주를 울릉도 도감의 묵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일안(日案)」 4, 문서번호 5572] -
5월 4일외부대신 박제순,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수케에게 공동 조사안을
수락한다고 통보.
[『구한국외교관계부속문서(舊韓國外交關係附屬文書)』, 「교섭국일기(交涉國日記)」, 광무 4년(1900) 3월 27일·5월 4일 ;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일안(日案)」 4, 문서번호 5652] -
5월 31일울릉도시찰위원 우용정, 부산주재 일본영사관보 아카쓰카
쇼수케[赤塚正補] 등 한일공동조사단, 울릉도에 도착.
6월 5일까지 일본인의 비행 등을 조사. 울릉도 내 일본인 수는 144명[새로 들어온자 77], 한국인 호구는 400여 호,
남녀 합계1,700여 명, 전토(田土) 7,700여 두락.
[『울도기(鬱島記)』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국사편찬위원회소장),
‘각영사기밀래신(各領事機密來信)'(明治 33년, 1900), 부산영사관 기밀 제17호(명치 33년 6월 12일)] -
6월 초순우용정, 도민들의 내륙 왕래용 선박 개운환(開運丸)의 구입 비용
마련.
[「훈령개운회사중(訓令開運會社中)」] -
6월 7일울릉도시찰위원 우용정, 귀경하여 보고서 제출. 울릉도 재류 일본인을
조속히 철수시켜 도민과 삼림을 보호하고,
울릉도 관제도 개편해야 한다고 보고.
[『울도기(鬱島記) ; 『보고서(報告書)』] -
6월 27일내부대신 이건하(李乾夏)·외부대신 박제순, 외부에서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수케와 회합하여 울릉도 재류
일본인의 철수를 요청.
[『구한국외교관계부속문서(舊韓國外交關係附屬文書)』, 「교섭국일기(交涉國日記)」,광무 4년(1900) 6월 27일 ; 「황성신문(皇城新聞)」 광무 4년 6월 29일] -
9월 5일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수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한국 측의 울릉도
재류 일본인의 철수 요청을 거부한다고 통보.
[『구한국외교관계부속문서(舊韓國外交關係附屬文書)』, 「교섭국일기(交涉國日記)」, 광무 4년(1900) 9월 5일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일안(日案)」 4, 문서번호 5901] -
10월 22일내부(內部), ‘울릉도 울도(鬱島)로 개칭(改稱)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改正)에 관(關)
청의서(請議書)’를 의정부에 제출.
[「각부청의서존안(各部請議書存案)」 17(규장각소장)] -
10월 27일광무 4년 10월 25일자 칙령 제41호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 건(件)’을 관보(官報)에 게재하고 반포. 제2조, 울도군의 관할 구역으로 울릉
전도(鬱陵全島)·죽도(竹島)와 석도(石島, 독도)를 규정하고
있음.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 「칙령(勅令)」 9, 광무 4년(1900) 10월 25일 ;『관보(官報)』제1716호 광무 4년
10월 27일 ;『고종실록(高宗實錄)』권 40] -
11월 26일울도군 초대 군수에 배계주(裵季周)를 임명.
[『관보(官報)』광무 4년(1900) 11월 29일]
- 1901년 (광무 5,명치[明治] 34)
-
연초내부(內部) 관원 최성린(崔聖麟), 울도군 설치를 준비하기 위해 울릉도에
파견됨. 이 무렵 향교도 건립됨.
[「황성신문(皇城新聞)」 광무 5년(1905) 1월 18일·2월 27일] -
8월부산해관의 스미스(Smith, D. H. 士彌須), 동방판(同幇辦)
김성원(金聲遠) 등, 울릉도의 일본인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울릉도에 파견됨.
[「황성신문(皇城新聞)」 광무 6년(1906) 4월 29일] -
8월 20일부산해관의 스미스, 울릉도의 일본인 실태에 관해 보고서 제출.
울릉도에 상주하는 일본인은 약 550명이고, 섬 안
일본인은 두 개 파벌로 나뉘어 지역을 남북으로 양분하고 있으며, 섬 안의 일본인 선박은 21척이라는 등의 내용. 「황성신문(皇城新聞)」 광무 6년(1906) 4월 29일] -
9월 14일울도군, 전체 섬이 일본인으로 가득차고 일본인에 의해 삼림이
황폐해졌으며, 토지마저 그 수중으로 들어가고야 말
것임을 보고.
[『구한국외교관계부속문서(舊韓國外交關係附屬文書)』, 「교섭국일기(交涉國日記)」, 광무 5년(1901) 9월 10일·14일 ; 「황성신문(皇城新聞)」 광무 5년(1901) 9월 12·18일]
- 1902년 (광무 6,명치[明治] 35)
- 1월영일동맹 성립. 일본, 한국에 대한 특수권익을 영국으로부터 승인 받음.
-
3월울릉도에 일본 경찰관 주재소가 신설됨.
[「울릉도우편소연혁부(鬱陵島郵便所沿革簿)」(울릉군우편국[鬱陵島郵便局] 소장)] -
4월내부(內部), 울도군 관할 구역에 대한 행정 지침인
「울도군절목(鬱島郡節目)」을 내림.
[「울도군절목(鬱島郡節目)」] -
10월 11일외부대신서리 최영하(崔榮夏),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수케에게
울릉도에 있는 일본 경찰관 주재소의 폐지와 재류
일본인의 철수를 급히 요청.
[『구한국외교관계부속문서(舊韓國外交關係附屬文書)』, 「교섭국일기(交涉國日記)」, 광무 6년(1902) 10월
11일 ;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일안(日案)」 6, 문서번호 7057·7501] -
10월 29일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수케, 외부대신 임시서리 조병식(趙秉式)에게
한국 측의 울릉도 일본 경찰관 주재소 폐지와 재류 일본인 철수 요구를 거부.
[『구한국외교관계부속문서(舊韓國外交關係附屬文書)』, 「교섭국일기(交涉國日記)」, 광무 6년(1902) 10월
30일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일안(日案)」 6, 문서번호 7084·7515]
- 1903년 (광무 7,명치[明治] 36)
-
1월 29일심흥택(沈興澤)을 울도군수(鬱島郡守)에 임명하였음을 관보에 게재.
[『관보(官報)』광무 7년(1903) 1월 29일] -
4월 20일울도군수 심흥택, 울릉도에 부임.
[『관보(官報)』광무 7년(1903) 8월 11일 ; 「황성신문(皇城新聞)」 광무 7년(1903) 8월 10일·11월 17일] -
5월 16일일본 시마네 현 어업인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 독도에
도착하여 강치 사냥.
[「도근현총무부총무과소장(島根縣總務部總務課所藏),『죽도대하․해려어업서류(竹島貸下海驢漁業書類)』, 1905~1908년, 문서번호 033-1, 「명치 36년의 조사[明治36年中ノ調査]
(중정양삼랑죽도해려어업경영[中井養三郞竹島海驢漁業經營])」] -
8월 20일외부대신 이도재(李道宰),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수케에게 울릉도에
있는 일본 경찰관 주재소의 폐지와 재류
일본인의 철수를 거듭 요청. -
8월 24일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수케, 외부대신 이도재에게 한국 측의 울릉도
일본 경찰관 주재소 폐지와 재류 일본인 철수
요구를 거부. -
이해울도군 군아(郡衙)를 도동(道洞)으로 옮김.
관속(官屬)·이교(이교(吏校)도 배치.
[「황성신문(皇城新聞)」 광무 7년(1903) 10월 14일 ; 「울릉도우편소연혁부(鬱陵島郵便所沿革簿)」
(울릉군우편국[鬱陵島郵便局] 소장)]
- 1904년 (광무 8,명치[明治] 37)
- 2월 8일일본군 여순(旅順)을 기습 공격. 러일전쟁 시작.
- 2월 23일한일의정서 성립.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군사·외교적 간섭이 합리화됨.
- 4월한일통신기관협정서 성립. 우편·전신·전화사업이 일본으로 이관됨.
-
5월 18일일본의 강요로 러시와 체결한 조약·협정을 폐기하고 러시아인이나
회사에 양여한 두만강·압록강·울릉도 삼림
벌식권(伐植權) 등의 폐기를 내용으로 하는 ‘칙선서(勅宣書)’ 반포.
[『칙령(勅令)』(규장각소장), 광무 8년(1904) 5월 18일 ; 『관보(官報)』광무 8년(1904) 5월 18일 호외(號外),
24일 ; 『고종실록(高宗實錄)』권 44] -
6월 1일울릉도에서 일본 우편수취소(郵便受取所) 설치.
[「울릉도우편소연혁부(鬱陵島郵便所沿革簿)」(울릉군우편국[鬱陵島郵便局] 소장)] -
7월 5일일본 해군, 울릉도 망루 건설을 결정.
[『극비 명치삼십칠팔년해전사(極秘明治三十七八年海戰史)』 (해군군사령부편[海軍軍司令部編]) 제4부 제4권, 48~57쪽] -
9월 2일울릉도 동망루(東望樓)·서망루(西望樓) 활동 개시.
[『극비 명치삼십칠팔년해전사(極秘明治三十七八年海戰史)』(해군군사령부편[海軍軍司令部編]) 제4부 제4권, 48~57쪽] -
9월 25일일본 해군, 9월 8일부터 시작한 죽변만(竹邊灣)과 울릉도 망루를
연결하는 해저 전신선 부설 완성
[『극비 명치삼십칠팔년해전사(極秘明治三十七八年海戰史)』(해군군사령부편[海軍軍司令部編]) 제4부 제4권] -
일본 군함 니이다카[新高]호의『행동일지(行動日誌)』, 독도에 대해 “(울릉도) 한인들은
‘독도(獨島)’라고
쓰고[書], 일본 어부들은 ‘량고도[リヤンコ島, 리앙쿠르섬]’라고 부른다.”고 기록.
[『군함신고행동일지(軍艦新高行動日誌)』1904년 9월 25일] -
9월 29일시마네 현 어업인 나카이 요사브로[中井養三郞],
「량코도(독도) 영토 편입 및 대하원[リヤンコ島領土編入並ニ貸下願]」을 내무·외무·농상무상 앞으로 제출.
[「량코도[독도] 영토 편입 및 대하원[リヤンコ島領土編入並ニ貸下願]] -
11월 20일일본 군함 쓰시마[對馬]호, 독도가 한일 간을 연결하는 해전
전선의 중계지로 전신소(電信所) 설치에 적합한 지를
조사하기 위해 독도에 도착.
[「량코도[독도]가 유선 전신소 설치에 적합한지 않은지 시찰할 것[リヤンコ島ハ電信所(無線電信所ニ非ズ)設置ニ適スルヤ否ヤヲ視察スルコト]」 ;『군함대마전시일지(軍艦對馬戰時日誌)』]
- 1905년 (광무 9,명치[明治] 38)
-
1월 5일일본 군함 쓰시마호 함장, 독도의 지형 등을 조사한 보고서를 해군성
수로부장에게 제출. 지형이 험하고 마실 물도
없다고 보고.
[「대마함장 해군중좌 仙頭武央으로부터 수로부장에게 제출된 량코도 개요[對馬艦長海軍中佐仙頭武央ヨリ水路部長ニ提出セルヤンコ-ルド島槪要]」] -
1월 10일일본 내무성, 내각에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 즉 량코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 ‘죽도[竹島]’로 명명하여 시마네 현 소속 오키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할 것을 청의(請議).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無人島所屬ニ關スル件]」(『공문유취(公文類聚)』 제29편, 권 1)] -
1월 28일일본 각의(閣議), 내무성에서 청의한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을
승인. 오키도 서북 85리에 있는
무인도[량코도, 즉 독도]는 다른 나라에서 점령했다고 인정할 만한 형적이 없고, 1903년 이래 나카이 요사브로가
이 섬에 이주하여 어업에 종사한 것이 명백하므로 국제법상 점령한 사실이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등의 내용.
[「명치삼십팔년일월이십팔일각의결정(明治三十八年一月二十八日閣議決定)」(『공문유취(公文類聚)』 제29편, 권 1)] -
2월 15일일본 내무성, 시마네 현 지사에게 훈령 제87호로 각의의 결정을
관내에 고시할 것을 지령.
[「내무대신 훈령 훈제팔칠호(內務大臣訓令 訓第八七號)」] -
2월 22일일본 시마네[島根] 현 지사 마쓰나가 다케요시[松永武吉],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를 지방신문에 고시, 독도에 대한
영토 편입을 고시.
[도근현고시 제40호(島根縣告示第四十號)] - 5월 17일일본, 독도를 관유지(官有地)로서 시마네현 토지대장에 등재.
- 5월 27일일본 함대, 쓰시마 동북해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 대파.
- 6월 5일시마네 현 지사, 나카이 요자부로 외 3명에게 독도에서의 강치 어업을 허가.
-
6월 13일일본 군함 하시다테[橋立]호, 독도에 망루를 설치할 장소와 방법에
대해 조사.
[「죽도시찰보고(竹島視察報告)」 제68호[海軍技手 水口吉五郞], 제69호[제3함대 사령관 武富邦鼎],
제70호[橋立艦長 福井正義] ;『전함교립전시일지(戰艦橋立戰時日誌)』1905년 6월 13일] -
7월 14일일본 해군, 독도에 상륙하여 망루를 건설 시작.
[『극비 명치삼십칠팔년해전사(極秘明治三十七八年海戰史)』(해군군사령부편[海軍軍司令部編]) 제4부 제4권] -
8월 19일일본 해군, 독도 망루 준공, 업무 개시. 시마네 현 지사 마쓰나가
다케키치, 수행원 3명과 해군 용선(海軍用船)
교토호[京都号]에 승선하여 독도 시찰.
[『극비 명치삼십칠팔년해전사(極秘明治三十七八年海戰史)』(해군군사령부편[海軍軍司令部編]) 제4부 제4권] - 9월 5일러시아와 일본, 포츠머스 조약 체결.
-
10월 8일울릉도 북망루와 독도 망루 사이에 해저전선 부설.
[『극비 명치삼십칠팔년해전사(極秘明治三十七八年海戰史)』(해군군사령부편[海軍軍司令部編]) 제4부 제4권] -
11월 9일일본, 독도와 일본 시마네현 마쯔에[松江] 사이에 해저전선 부설.
[『극비 명치삼십칠팔년해전사(極秘明治三十七八年海戰史)』(해군군사령부편[海軍軍司令部編]) 제4부 제4권] - 11월 17일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 체결.
- 1906년 (광무 10,명치[明治] 39)
-
3월 27일시마네 현 사무관 진자이 요시타로[神西由太郞]을 책임자로 하는 일본
관민 45명으로 구성된 조사대, 독도를 조사.
[『竹島及鬱陵島』[오쿠하라 헤키운(奧原碧雲), 「죽도도항일지(竹島渡航日誌)」] -
3월 28일진자이 요시타로 등, 울릉도에 상륙하여 울도군아(鬱島郡衙)로 군수
심흥택을 방문, 독도가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다고 알림.
[「울릉군수 심흥택 보고서 부본(鬱陵郡守沈興澤報告書副本)」] -
3월 29일울도군수 심흥택, 강원도관찰사서리 춘천군수 이명래(李明來)에게 3월
4일(양력 3월 28일) 일본 관인 일행이 ‘본군 소속 독도(獨島)’가 ‘일본 영지(領地)’로 편입되었음을 알려온
사실을 보고.
[「울릉군수 심흥택 보고서 부본(鬱陵郡守沈興澤報告書副本)」] ;『각관찰도안(各觀察道案)』 1,
「보고서호외(報告書號外)」] -
4월 29일강원도관찰사서리 춘천군수 이명래,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에게
「보고서호외(報告書號外)」로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를 송부.
[『각관찰도안(各觀察道案)』1, 「보고서호외(報告書號外)」] -
5월 1일『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207호) 「잡보(雜報)」란에 울도
군수 심흥택의 보고와 이에 대한 내부의 지령을 보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1906년 5월 1일(207호) 「잡보(雜報)」] -
5월 7일강원도관찰사서리 춘천군수 이명래의 「보고서호외」, 의정부
외사군(外事局)에 접수.
[『각관찰도안(各觀察道案)』1, 「보고서호외(報告書號外)」] -
5월 9일『황성신문(皇城新聞)』(2175호) 「잡보」란, 5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 「잡보」란의 기사와 같은 내용을 보도.
[『황성신문(皇城新聞)』1906년 5월 9일(2175호) 「잡보」] -
5월 20일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 강원도관찰사에게 지령 제3호로 독도의 일본
‘영지지설(領地之說)’을 강력히 부인하며,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다시 조사·보고할 것을 지령.
[『각관찰도안(各觀察道案)』1, 「지령 제3호(指令第三號)」] -
9월 24일울도군이 강원도에서 경상남도로 이관.
[『관보(官報)』광무 10년(1906) 9월 28일 부록 칙령 제4호]
- 1908년 (융희 2)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편찬. 우산도(芋山島, 독도)가 울도군 소속으로 기록됨.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권 31, 「여지고(輿地考)」 19, ‘해방(海防)’ 1, 동해(東海),
울진고현포우산도울릉도(蔚珍古縣浦于山島鬱陵島)]
- 1910년 (융희 4)
- 8월 22일‘한일합병조약’ 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