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고려사(高麗史)

기록물 정보

  • 발행국한국
  • 저자(제작자, 발행자)김종서, 정인지 등
  • 발행연도1451(문종 1)
  • 소장기관국회, 국중, 국편, 동북아, 서울대, 한중연
  • 원문MONO1200215282
  • 소개글권1, 「세가」 1, 태조 13년(930) 8월에 울릉도에서 백길과 토두라는 두 사람을 보내서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 등 14건의 울릉도·독도 관련 기록이 있음

상세내용

930년(태조 13) 8월 우릉도(芋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 토산물을 바침

<<고려사(高麗史)>> 권 1, 「세가(世家)」 1, 태조(太祖) 13년(930, 경인[庚寅]) 8월 병오일(丙午日) ○ 원문 (太祖 十三年 秋八月) 丙午 芋陵島遣白吉土豆 貢方物 拜白吉爲正位 土豆爲正朝 ○ 번역문 (태조 13년[930] 가을 8월) 병오일에 우릉도(芋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백길에서 정위(正位), 토두에게 정조(正朝) 품계를 각각 주었다. ○ 해설

1018년(현종 9) 11월 우산국(于山國)이 동북여진의 침입을 받아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자 농기구를 하사함

<<고려사(高麗史)>> 권 4, 「세가(世家)」 4, 현종(顯宗) 9년(1018, 무오[戊午]) 11월 병인일(丙寅日) ○ 원문 (顯宗 九年 十一月 丙寅) 以于山國被東北女眞所寇 廢農業 遣李元龜 賜農器 ○ 번역문 (현종 9년[1018] 11월 병인일) 우산국(于山國)이 동북 여진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이원구(李元龜)를 파견하여 농기구를 하사하였다. ○ 해설

1019년(현종 10) 7월 여진의 침략을 받아 망명해왔던 우산국 민호들을 돌려보냄

<<고려사(高麗史)>> 권 4, 「세가(世家)」 4, 현종(顯宗) 10년(1019, 기미[己未]) 7월 기묘일(己卯日) ○ 원문 (顯宗 十年 秋七月) 己卯 于山國民戶 曾被女眞虜掠來奔者 悉令歸之 ○ 번역문 (현종 10년[1019] 가을 7월) 기묘일에 우산국(于山國) 민호(民戶)들로서 일찍이 여진의 침략을 받고 망명하여 왔던 자들을 모두 우산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 해설

1022년(현종 13) 7월 여진의 침략을 받아 도망 온 우산국 백성들을 예주(禮州)에 배치하고 편호(編戶)함

<<고려사(高麗史)>> 권 4, 「세가(世家)」 4, 현종(顯宗) 13년(1022, 임술[壬戌]) 7월 병자일(丙子日) ○ 원문 (顯宗 十三年) 秋七月 丙子 都兵馬使奏 于山國民被女眞虜掠逃來者 處之禮州 官給資糧 永爲編戶 從之 ○ 번역문 (현종 13년[1022]) 가을 7월 병자일에 도병마사가 여진에게서 약탈을 당하고 도망하여 온 우산국 백성들을 예주(禮州-경북 영해)에 배치하고 관가에서 그들에게 식량을 주어 영구히 그 지방 편호(編戶)로 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 제의를 따랐다. ○ 해설

1032년(덕종 1) 11월 우릉성주(羽陵城主)가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 토산물을 바침

<<고려사(高麗史)>> 권 5, 「세가(世家)」 5, 덕종(德宗) 1년(1032, 임신[壬申]) 11월 병자일(丙子日) ○ 원문 (德宗 元年) 十一月 丙子 羽陵城主 遣子夫於仍多郞 來獻土物 ○ 번역문 (덕종 원년[1032]) 11월 병자일에 우릉성주(羽陵城主)가 자기의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 해설

1141년(인종 19) 7월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 이양실(李陽實)이 울릉도(蔚陵島)에서 구한 과실 종자 등을 가져다 바침

<<고려사(高麗史)>> 권 17, 「세가(世家)」 17, 인종(仁宗) 19년(1141, 신유[辛酉]) 7월 기해일(己亥日) ○ 원문 (仁宗 十九年) 秋七月 己亥 溟州道監倉使李陽實 遣人 入蔚陵島 取菓核木葉異常者以獻 ○ 번역문 (인종 19년[1141]) 가을 7월 기해일에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 이양실(李陽實)이 울릉도(蔚陵島)에 사람을 보내 이상한 과실 종자와 나뭇잎을 가져다가 왕에게 바쳤다. ○ 해설

1157년(의종 11) 5월 김유립(金柔立)을 시켜 우릉도(羽陵島)를 조사했는데, 백성들이 살 수 없다는 보고를 듣고 논의를 그만둠

<<고려사(高麗史)>> 권 18, 「세가(世家)」 18, 의종(毅宗) 11년(1157, 정축[丁丑]) 5월 병자일(丙子日) ○ 원문 (毅宗 十一年 五月 丙子) 王聞 東海中有羽陵島 地廣土肥 舊有州縣 可以居民 遣溟州道監倉殿中內給事金柔立 往視 柔立回奏 土多巖石 民不可居 遂寢其議 ○ 번역문 (의종 11년[1157] 5월 병자일) 왕이 동해 가운데 있는 우릉도(羽陵島)는 지역이 넓고 땅이 비옥하며 옛날에는 주(州), 현(縣)을 두었던 적이 있어서 백성들이 살 만하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溟州道) 감창(監倉) 전중 내급사(殿中內給事) 김유립(金柔立)을 파견하여 가 보게 하였다. 김유립이 돌아와 아뢰기를, 그곳에는 암석들이 많아서 백성들이 살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그 의논이 잠잠해졌다. ○ 해설

1259년(원종 즉위년) 7월 울진 현령 박순(朴淳)이 울릉도(蔚陵島)로 도망가려다 붙잡힘

<<고려사(高麗史)>> 권 25, 「세가(世家)」 25, 원종(元宗) 즉위년(1259, 기미[己未]) 7월 경오일(庚午日) ○ 원문 (元宗 卽位年 秋七月 庚午) 蔚珍縣令朴淳 船載妻孥臧獲幷家財 將適蔚陵 城中人知之 會淳入城 被拘留 舟人以其所載 遁去 ○ 번역문 (원종 즉위년[1259] 가을 7월 경오일) 울진 현령 박순(朴淳)이 처자와 노비 및 가산을 배에 싣고 울릉도(蔚陵島)에 가려고 하였다. 성안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마침 성안에 들어 온 박순을 붙잡아 두었는데, 뱃사람들은 배에 실은 가산을 가지고 달아나 버렸다. ○ 해설

1273년(원종 14) 2월 첨서추밀원사 허공(許珙)을 울릉도 작목사(斫木使)로 임명하여 보냄

<<고려사(高麗史)>> 권 27, 「세가(世家)」 25, 원종(元宗) 14년(1273, 계유[癸酉]) 2월 계축일(癸丑日) ○ 원문 (元宗 十四年 二月 癸丑) 以簽書樞密院事許珙 爲蔚陵島斫木使 伴李樞以行 王奏請 罷蔚陵斫木减 洪茶丘麾下五百人衣服 平三別抄後 濟州人物 勿令出陸 依舊安業 帝皆從之 ○ 번역문 (원종 14년[1273] 2월 계축일) 첨서 추밀원사 허공(許珙)을 울릉도작목사(蔚陵島斫木使)로 임명하여 이추(李樞)와 함께 가게 하였다. 왕이 (원나라) 황제에게 보고하여 울릉도에서 나무를 찍는 일과 홍다구의 부하 5백 명의 의복을 마련하는 것을 축감해 달라는 것과 삼별초를 평정한 후 제주의 주민들은 육지에 나오지 말고 예전대로 자기 생업에 안착하게 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더니 (원나라) 황제가 그 제의를 좇았다. ○ 해설

1346년(충목왕 2) 3월 동계(東界)의 우릉도(芋陵島) 사람이 내조(來朝)함

<<고려사(高麗史)>> 권 37, 「세가(世家)」 35, 충목왕(忠穆王) 2년(1346, 병술[丙戌]) 3월 무신일(戊申日) ○ 원문 (二年 三月) 戊申 東界芋陵島人 來朝 ○ 번역문 (충목왕 2년[1346] 3월) 무신일에 동계(東界)의 우릉도(芋陵島) 사람이 내조(來朝)하였다. ○ 해설

울릉도는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음

<<고려사(高麗史)>> 권 제58, 「지(志)」 제12, 지리(地理) 3, 동계(東界), 울진현(蔚珍縣) ○ 원문 蔚珍縣 本高句麗于珍也縣[一云古于伊郡] 新羅景德王改今名爲郡 高麗降爲縣置令 有鬱陵島[在縣正東海中 新羅時 稱于山國 一云武陵 一云羽陵 地方百里 智證王十二年 來降 太祖十三年 其島人使白吉土豆 獻方物 毅宗十一年 王聞鬱陵地廣土肥 舊有州縣 可以居民 遣溟州道監倉金柔立 往視 柔立回奏云 島中有大山 從山頂向東行至海一萬余步 向西行一萬三千余步 向南行一萬五千余步 向北行八千余步 有村落基址七所 有石佛鐵鍾石塔多 生柴胡蒿本石南草 然多岩石 民不可居 遂寢其議 一云于山武陵本二島 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 번역문 울진현(蔚珍縣)은 원래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고우이군(古于伊郡)이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군으로 만들었으며 고려에 와서 현으로 낮추고 현령을 두었다. 울릉도(鬱陵島)가 있다[현의 정동(正東)쪽 바다 가운데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于山國)이라 불렀는데, 무릉(武陵) 또는 우릉(羽陵)이라고 불렀다. 이 섬의 땅은 사방 100리이며 지증왕 12년에 항복해 왔다. 태조 13년에 이 섬 사람이 백길(白吉)․토두(土豆)를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다. 의종 11년에 왕이 울릉도는 토지가 넓고 비옥하며 옛날에는 주현을 설치한 일도 있어 능히 백성들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 감창(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파견하여 가서 시찰하게 하였다. 김유립이 돌아 와서 보고하기를, “섬 안에는 큰 산이 있고 이 산마루로부터 바다까지의 거리는 동쪽으로는 1만여 보(步)이며 서쪽으로는 1만 3천여 보, 남쪽으로는 1만 5천여 보, 북쪽으로는 8천여 보이며, 마을이 있던 옛 터가 7개소 있고 돌부처, 철로 만든 종, 돌탑 등이 있으며, 시호(柴胡) 고본(藁本), 석남초(石南草) 등이 많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위와 돌들이 많아서 사람이 살 곳이 못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이 섬을 개척하여 백성들을 이주시키자는 논의가 중지되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우산(于山)과 무릉(武陵)은 원래 2개의 다른 섬이고, 그 거리가 가까워서 바람이 나고 맑은 날씨에는 눈으로 바라다 볼 수 있다고도 한다.]. ○ 해설

1243년(고종 30) 울릉도(蔚陵島)에 주민을 이주시켰다가 익사자가 많이 생기자 중지함

<<고려사(高麗史)>> 권 제129, 「열전(列傳)」 제42, 반역(叛逆) 3, 최충헌(崔忠獻)[최이(崔怡)최항(崔沆)최의(崔竩)] ○ 원문 (高宗 三十年) 東海中有島 名蔚陵 地膏沃 多珍木海錯 以水程遠 絶往來者久 怡遣人視之 有屋基破礎宛然 於是 移東郡民 實之 後以風濤險惡 人多溺死 罷其居民 ○ 번역문 (고종 30년[1243]) 동해(東海) 중에 울릉도(蔚陵島)라는 섬이 있는데 땅이 비옥하고 진귀한 나무들과 해산물이 많이 산출되나 물길이 멀어서 왕래하는 사람이 끊어진 지 오래 되었다. 최이(崔怡)가 사람을 보내서 시찰한즉 과연 집터와 주춧돌이 완연히 있었으므로 동부(東部)지방 군(郡)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그 후 풍랑과 파도가 험악해서 익사자가 많았기 때문에 그 백성들을 거주시키는 일을 중지하였다. ○ 해설

1272년(원종 13) 원나라에서 파견된 이추(李樞)가 울릉도(蔚陵島)에 들어가 나무를 벌목함

<<고려사(高麗史)>> 권 제130, 「열전(列傳)」 제43, 반역(叛逆) 4, 조이(趙彛)[김유(金裕)이추(李樞)] ○ 원문 有金裕李樞者 亦反人也 …… 樞 上將軍應公之子 初名唐古 嘗反入元 妄奏金漆靑藤八郞虫 榧木 奴台木 烏梅華梨藤席等物 産於本國 帝信之 遣必闍赤黑狗 及樞等 來索之 …… 未幾 元遣樞 又索材木 樞欲入蔚陵島斫木 王以大將軍姜渭輔 爲伴行 樞以三品秩卑 言曰 三品如狗耳 吾不可與同行 乃以簽書樞密事許珙 代之 王請于元 遂罷之 ○ 번역문 김유(金裕)와 이추(李樞)란 자가 있는데, 또한 고려를 배반한 자들이었다. …… 이추는 상장군 이응공(李應公)의 아들이요 처음 이름은 이당고(李唐古)였다. 일찍이 고려를 배반하고 원나라로 들어가서 황제에게 금칠(金漆) 청등팔랑충(靑藤八郞蟲) 비목(榧木), 노대목(奴台木), 오매화리등석(烏梅華梨藤席) 등의 물품이 본국에서 생산된다고 허황한 말을 하였는데 황제가 그것을 곧이듣고 필도적(必闍赤) 흑구(黑狗)와 이추 등을 파견하여 그것을 요구하였다. …… (원종 13[1272] 12월) 얼마 안 지나서 원나라에서 또 이추를 보내서 재목을 요구했다. 이추는 울릉도(蔚陵島)로 건너가서 나무를 벌목하고자 했으므로 왕은 대장군 강위보(康渭輔)를 동행시켰는데, 이추는 3품 관질은 낮다 하여 “3품이란 개 같은 것인데 어찌 데리고 다니겠느냐!”라고 하였으므로 첨서 추밀사 허공(許珙)을 대신 보냈다. 왕이 원나라에 청하여 드디어 이추를 파면시켰다. ○ 원문

1379년(우왕 5) 왜구가 무릉도(武陵島)에 침입해 반달 동안 머물러 있었음

<<고려사(高麗史)>> 권 제134, 「열전(列傳)」 제47, 신우(辛禑) 2, 신우(辛禑) 5년(1379, 기미[己未]) 7월 ○ 원문 (五年) 七月 倭寇樂安郡 …… 李子庸還自日本九州節度使源了俊歸被虜人二百三十餘口獻槍劒及馬 倭入武陵島留半月而去 八月 倭寇餘美縣又寇隨郭二州 ○ 번역문 (우왕 5년[1379]) 7월에 왜적이 낙안군(樂安郡)에 침입하였다. …… 이자용(李子庸)이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일본의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俊)이 포로로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 2백30여 명을 돌려보냈으며 창․검과 말을 바쳤다. 왜적이 무릉도(武陵島)에 침입하여 반달이나 머물러 있었다. 8월에 왜적이 여미현(餘美縣)에 침입하였으며 또 수주(隨州)와 곽주(郭州)에 침입하였다. ○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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