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러일전쟁까지 독도는 조선 땅 인식했다[대경일보, 2025.01.30.]
◎ 일본, 러일전쟁까지 독도는 조선 땅 인식했다 김문길 박사, 독도를 신영토로 하고 물개 잡도록 청원서낸 일본 시마네현 어부 문서 발견 [대경일보, 2025년 1월 30일] ○ 일본 시마네현 어민이 러일전쟁까지 '독도'(일본명 竹島)를 남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일본 공식문서가 발견됐음 - 시마네현은 독도를 죽도로 부르며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데 앞장서는 최첨단에 위치한 지역임 - 일본역사에 정통한 김문길 박사, 30일 :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오키도(隱岐島)어민들이 밀업을 해서 생계를 하다가 러일전쟁(1904~1905년)이 시작되니 독도를 죽도로하고 신영토(新領土)에서 물개를 잡도록 해달라는 청원서를 오키 도주(島主)에게 보낸 문서를 처음 입수해 전격 공개했음 - 김 박사가 밝힌 첫번째 자료는 하시오카 도모지료(橋岡 友次郞)가 낸 문서로 '영수 제906호' 번호가 부여돼 있음 : 내용은 "본월 14일부 농제265호를 가지고 조회하는 하시오카 도모지로(橋岡 友次郞)가 다케시마를 신영토(新領土)로 하고 도해해 물개(海驢) 어업을 하자는 것이다. 우인(右人)을 소환(召喚)해 조사하니 이와 같이 틀림없음을 접수하나이다. 명치 38년 4월18일 오키치군 고카촌장(隱岐郡 五個村長)스에카이 마사미츠 (末海貞三) 대리조역(助役)후지다겐(藤田謙)"에 인이 찍혀 있음 - 김문길 박사 : "러일전쟁 직전에 오키섬 어부들이 서로 경쟁해 독도물개를 잡기위해 앞다퉈 허가 서류를 낸 것을 알수 있다“ : "하시오카가 접수하고 그 이튿날 또 다른 이도구치 어부도 죽도에 가서 물개(해려)를 잡도록 청원서 낸 것"이라고 설명했음 - 두 번째 이도 구치 누다(井臼 龍太)의 문서는 '영수(收) 제1682호'가 부여돼 있음 : 내용은 "본월 14일부 농제 265를 조회하는 이도 구치누다은 신영토 다케시마(리앙쿠루트, 즉 독도)는 명치 36년부터 37년까지 도해해 물개(海驢)를 잡고 있으니, 앞으로 신영토로 하자는 서류를 조사했다. 우인을 소환해 조사해서 물개를 잡도록 회보하나이다. 명치 38년 4월19일 나카무라장(中村長)무라호 송신(村浦 送信), 나카무라조역(中村助役) 이도우치 유키다(井臼 雪太)"에 인이 찍혀있음 - 이 밖에 이들을 보낸 서류봉투와 봉투 주소도 같이 공개됐음 - 김문길 박사 : "이 두 문서는 오키섬 고가어촌마을 하시오카 어부와 나카무라어촌 이도구치가 오키 섬주께 보낸 문서“ : "독도를 신영토로하고 물개를 잡도록 하는 내용으로 보건데 러일전쟁 이전에 남의 나라 섬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밀업을 했고, 이제는 자기나라 땅 신영토하자는 문서로서 러일전쟁전에는 남의 영토에 밀업을 했다는 증거가 분명하다. 다만 일본땅 신영토로하자는 어부들의 정식문서는 보도 되지 않았다"고 밝혔음 : "이 문서들은 시마네현 다케시마사료관에 보관된 문서로서 최근 발견했다“ : "일개 어부들이 낸 청원서를 도주가 시마네현 청장에게 보내 남의 나라 영토 도서(島嶼)를 빼앗아 가 세계 이목이 된 영토 싸움이 됐다. 이 어리석은 싸움이 언제 끝날지 참으로 안타깝다"고 밝혔음 - 김문길 박사 : 교토대 학부에서 일본문화를 연구했음 : 국립 고배대 일본사 학술박사, 일본 문화 철학 박사이며, 전 교토대학 외국인교수, 전 부산외대를 역임했고, 현재 한일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음 ○ 링크 - 일본러일전쟁까지독도는조선땅인식했다[대경일보, 2025.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