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이야기] 日, "독도 국제법정 가자" … 韓, "영토 분쟁 없다"[조선일보, 2020.06.28.]

  • 등록: 2020.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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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이야기] 日, "독도 국제법정 가자" … 韓, "영토 분쟁 없다"
[이선민의 독도이야기] [9] 일본, 외교 전술로 돌아서다
일본, 네 차례 외교 각서로 국제법 들먹이며 공세
한국은 역사적 근거 강조한 반박 각서들로 일축
[조선일보, 2020년 6월 28일]

○ 일본 정부에게 남은 방법은 외교 전술 밖에 없었음

- 독도를 주일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하여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하는 것처럼 호도하려는 술책도 한국 정부의 항의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음
: 일본 관리들이 독도로 몰려와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표목(標木)을 설치하는 것도 한국 정부의 단호한 대응으로 실패로 돌아갔음
: 일본은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전쟁과 무력행사를 금지한 평화헌법 때문에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었음
: 총격과 박격포까지 발사하는 한국 독도경비대에 대해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음

- 일본 정부는 1954년 9월 25일 주일(駐日)한국대표부에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갖고 가서 그 판정에 따르자는 구술서를 전달했음
: 이 구술서는 “문제가 국제법의 기본원리의 해석을 포함한 ‘영유권 분쟁’인 한 분쟁을 판결하기 위해 국제재판소에 위탁하는 것이 오직 평등한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음
: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 영유권에 관한 ‘분쟁’이 있다고 기정사실화한 것이었음

◇ 변영태 외무, “일본이 ‘가짜 영토 분쟁’ 꾸며내” 성명 발표

-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1954년 10월 28일 일본 측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구술서를 주일한국대표부를 통해 일본 정부에 전달했음
: 이 구술서는 “한국은 독도에 대해 처음부터 영유권을 갖고 있으며, 어떠한 국제법정에서도 그 영유권 증명을 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며 “영토 분쟁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가짜 영토 분쟁’을 꾸며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일본이다”라고 반박했음

- 변영태 외무장관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음

‘독도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물이다. 해방과 함께 독도는 다시 우리의 품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 독립의 상징이다. 이 섬에 손을 대는 자는 모든 한민족의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단 몇 개의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겨레 영해(領海)의 닻이다. 이것을 잃고서야 어찌 독립을 지킬 수가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 탈취를 꾀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 영문학 교수 출신인 변영태는 업무 처리에 아주 꼼꼼했고 성명문을 직접 다듬고 고치는데 매우 정성을 쏟았음
: 국제법을 들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갖고 가자는 일본 측의 주장에 대해 그가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며 강력하게 반박한 논리와 정서는 지금까지도 독도에 관한 한국 정부 대응의 기조가 되고 있음
: 일본은 이후에도 한일회담이 진행되고 있던 1962년 독도 문제의 ICJ 행(行)을 주장했고,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2012년에도 같은 주장을 폈음
: 한국 정부는 그때마다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음

- 국내 재판은 원고가 소송을 제기하면 피고는 재판에 응해야 하지만 국제 재판은 원고와 피고의 쌍방이 동의하지 않으면 재판이 성립하지 않음
: 일본이 독도 문제를 국제 재판에 넘기자고 주장하는 것은 독도가 ‘분쟁 지역’이라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심어 주어 한국과 대등한 위치에 서려는 속셈임
: 일본은 ICJ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
: 지난 수십 년 동안 일본은 계속해서 ICJ 재판관을 배출했고, 한국은 한 명도 없었음
: 일본은 ICJ에 가장 많은 지원금을 내는 국가임
: 일본은 밑져야 본전이고 잘하면 이길 수 있다는 속셈으로 독도 문제의 ICJ 행을 주장하는 것임

◇ 12년이나 걸려 일단락된 ‘독도 외교 각서 논쟁’

- 일본은 이와 함께 한국에 독도 문제에 관한 본격적인 외교 논쟁을 걸어왔음
: 1952년 1월 18일 한국이 평화선을 선포한 직후부터 계속해서 항의하던 일본은 1953년 7월 13일 구술서의 첨부 문서로 ‘죽도(竹島)에 관한 일본 정부의 견해’라는 장문의 각서를 보내왔음
: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의 두 측면에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 각서에 대해 한국 정부는 1953년 9월 9일 그 내용을 반박하는 장문의 각서를 보냈음
: 일본 정부는 1954년 2월 10일 다시 한국 측 각서를 반박하는 두 번째 각서를 보내왔고, 한국 정부는 1954년 9월 25일 이를 반박하는 각서를 보냈음
: 일본 정부는 1956년 9월 20일 세 번째 각서를 보내왔고, 한국 정부는 1959년 1월 7일 이를 반박하는 각서를 보냈음
: 일본 정부는 1962년 7월 13일 네 번째 각서를 보내왔고,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1965년 “일본 측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하면서 독도 문제에 관한 한·일 간의 왕복 문서 공방은 끝났음

- 한국과 일본은 일곱 차례에 걸친 외교 각서 작성에 상당한 공을 들였음
: 처음에는 두세 달 만에 반박 각서가 작성되던 것이 6개월로 늘어나고, 공방이 치열해지면서 다시 2~3년으로 길어져 총 12년이나 걸렸음
: 독도 외교 각서 작성에는 양국의 외교관들은 물론 역사학자와 국제법학자들이 대거 참여했음
: 한국은 1947년 8월 제1차 울릉도·독도학술조사대에 참여한 뒤 ‘독도 소속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쓴 신석호를 비롯하여 유홍렬·이선근·최남선 등 저명한 역사학자들과 독도 문제에 관해 국제법적 연구를 개척한 이한기·박관숙 등 국제법학자들의 도움을 받았음

◇ 독도 관련 주요 논점 대부분 드러나

- 한·일 두 나라가 주고받은 독도 외교 각서에는 많은 논점들이 들어 있었음
: 이후에 독도 문제에서 쟁점이 되는 것들이 대부분 이때 드러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 양국의 학자들이 쟁점들에 관해 자기 나라의 입장을 강화해 줄 자료와 논리를 찾는 과정에서 본격적인 독도 연구가 시작됐음

- 논점 가운데 첫 번째는 한국의 고문헌에 등장하는 우산도(于山島)가 독도인가 아닌가라는 것이었음
: 한국 정부는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에 나오는 우산도 또는 삼봉도(三峯島)가 바로 독도이며, 이는 한국이 독도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시찰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했음
: 일본 정부는 우산도와 삼봉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했음

- 두 번째 논점은 독도를 일본이 영토로 관리한 적이 있는가라는 것이었음
: 일본 정부는 에도 막부의 3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시절에 오야(大谷)·무라카와(村川) 두 가문에 독도를 하사했고, 독도가 울릉도로 가는 임시 정박지로 사용됐다고 주장했음
: 한국 정부는 에도 막부가 두 집안에 부여한 ‘도해(渡海) 면허’는 원양 출어(出漁) 허가일 뿐이라고 주장했음

- 세 번째 논점은 1693년 발생한 안용복 납치 사건에 대한 해석 차이였음
: 한국 정부는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하는 일본인들에게 두 섬이 한국에 속함을 말하면서 엄중 경고했다고 주장했음
: 일본 정부는 안용복의 진술은 근거가 없는 가상의 것이라고 주장했음

- 네 번째 논점은 1906년 3월 시마네현 시찰단이 울릉도를 방문하여 1905년 1월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고 구두로 통고했을 때 울도 군수 심흥택이 중앙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관한 것이었음
: 한국 정부는 이 보고서에 ‘본군소속독도(本郡所屬獨島)’라는 표현이 나오는 점을 들어 당시 독도가 한국 영토였다고 주장했음
: 일본 정부는 심흥택이 시마네현 시찰단을 환대했고 이것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했음

- 다섯 번째 논점은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독도의 ‘고유영토론’과 ‘선점론(先占論)’이었음
: 당초 일본 정부는 무주지(無主地)였던 독도를 시마네현 고시(告示)를 통해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고 주장했음
: 3차 각서부터 일본의 고유영토였던 독도를 근대법 절차에 따라 영토 편입 절차를 다시 밟았다고 주장을 바꾸었음
: 한국 정부는 이 점을 파고들어 ‘무주지 선점론’과 ‘고유영토론’이 서로 모순된다고 지적했음

- 여섯 번째 논점은 독도를 일본 행정구역에서 제외한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SCAPIN) 제677호에 대한 해석이었음
: 일본 정부는 이것이 독도의 주권에 관한 최종 결정이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해 독도가 일본 영토로 남게 됐다고 주장했음
: 한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일본 영토에 관해 SCAPIN 제677호의 내용을 변경하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음

- 10년 이상 계속된 독도 문제에 관한 한국과 일본의 ‘외교 각서 전쟁’
: 한국은 역사적 근거, 일본은 국제법적 근거를 각각 강조했고 서로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는데 힘을 기울였음
: 한국은 당시 외교적·학문적 역량의 현격한 격차에도 불구하고 선전한 것으로 평가됨
: 독도 문제를 일선에서 담당한 외교관들의 사명감과 그를 적극적으로 도운 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였음

○ 링크 - 일본독도국제법정가자한국영토분쟁없다[조선일보, 2020.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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