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수영역서 ‘독도는 우리 땅’ 고문서 첫 공개 전시[동아일보, 2025.08.27.]
◎ 부산 수영역서 ‘독도는 우리 땅’ 고문서 첫 공개 전시 [동아일보, 2025년 8월 27일] ○ ‘독도는 우리 땅-고문서 전시’ - 13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됨 : 26일 오후 부산 수영구 부산도시철도 수영역 대기실 : 벽면을 따라 한자로 적힌 옛 문서와 고지도가 나란히 걸렸음 :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80)은 1975년부터 일본에서 수집한 독도 관련 고문서 25점을 전시했음 : 대부분 바삐 지나쳤으나 발걸음을 멈추고 전시물을 유심히 살피는 이들도 있었음 - 전시물 중 3점은 이번 전시에 최초로 공개되는 자료임 : 대표적인 것이 1904년 11월 시마네현 서기관과 독도와 가장 가까운 일본 영토인 오키섬 관계자가 주고받은 문서임 : 시마네현 측이 “어부인 나카이 요사부로가 ‘강치 잡는 섬의 명칭을 정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냈고, 오키섬은 “죽도로 하면 좋겠다”는 취지로 답했음 - 김 소장에 따르면 : 당시 일본에는 울릉도를 ‘죽도(竹島·다케시마)’, 독도는 ‘송도(松島·마츠시마)’로 부르는 관행이 자리 잡았음 : 어부들은 두 섬 모두를 죽도로 혼동하기도 했음 : 이 때문에 강치 잡는 섬(독도)의 명칭을 제대로 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 : 문서가 오간 이듬해인 1905년 1월 일본은 내각 회의를 거쳐 “다케시마가 주인 없는 땅”이라며 영토 편입을 결정했음 : 2월 22일에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전국에 이를 공고했음 : 그해 4월 발행된 ‘일본근해수선도(日本近海水線圖)’에는 독도가 죽도로 표기됐음 : 김 소장은 “오키섬이 시마네현에 보낸 문서는 일본이 독도 명칭을 죽도로 확정한 최초 공식 기록”이라고 설명했음 - 김 소장은 1905년 고시로 독도를 편입한 것은 불법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도 이곳에 함께 내걸었음 : 김 소장은 “편입 취지를 담은 고시 제40호에는 시마네현 수장의 직인이 안 찍혔다”며 “고시가 국제법상 효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하며 해당 문서를 가리켰음 : 1907년 어부 나카이가 독도 인근에서 강치를 잡아 왕궁에 보내고 대금을 청구하는 문서도 처음 공개했음 : 그는 “독도에서 일본이 왕성하게 강치를 잡아들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첫 행정 문서”라고 설명했음 - 지하철역을 전시 장소로 정한 이유에 대해 김 소장은 : “하루 1만 명 넘게 오가는 공간이어서 여느 전시회장보다 많은 이들이 독도 자료를 접하고 공부하는 기회가 될 것 같았다”고 말했음 - 김 소장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직전인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남 : 경북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1975년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교토대에서 일본사를 전공했음 : “일제강점기 한민족이 겪은 고초 등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일본의 역사부터 배워야 할 것 같아 일본사를 전공한 것” : “이때부터 독도 관련 자료를 차곡차곡 수집했다”고 말했음 - 부산외대 교수를 지낸 김 소장 : 2010년 퇴임 후 일본에서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 관련 사건 등 한일역사 관련 쟁점이 되는 사안을 발굴해 시민단체와 연구기관에 제공했음 : “일본에 나의 활동을 지지하는 동문과 연구자가 많아 다른 교수보다 더 많은 독도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 : “한민족의 혼과 얼을 찾기 위한 자료 발굴과 연구를 계속 이어나가겠다”고 말했음 ○ 링크 - 독도는우리땅고문서첫공개전시[동아일보, 2025.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