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조선일보에 詩 '독도여' 실은… 청마 유치환, 교통사고로 하늘에[조선일보, 2026.02.13.]
◎ 1956년 조선일보에 詩 '독도여' 실은… 청마 유치환, 교통사고로 하늘에 [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 1967년 2월 13일 59세 [조선일보, 2026년 2월 13일] ○ 시인 유치환(1908~1967) - 1967년 2월 13일 교통사고로 별세했음 : 부고 기사에 따르면 이날 밤 9시 30분쯤 부산 좌천동 미성극장 앞길에서 시내버스에 치여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숨졌음 : 당시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 재직 중으로 늦은 시간 퇴근하던 길이었음 - 유치환은 별세 1년 전인 1966년 1월 1일 조선일보에 신년 기념 시를 썼음 : ‘안개 걷히는 현해탄(玄海灘)’ ‘하늘에서 본 한국해협… 저기 아스라이 대마도가…’라는 기사에 부친 시였음 : 공군 T-33기를 타고 3만5000피트(약 10.6㎞) 상공에서 부산 영도와 낙동강, 바다 건너 대마도가 보이도록 찍은 대형 사진 아래 시가 실렸음 : 제목은 ‘저 은수(恩讐)의 지호(指呼)에 있는 자(者)’. ‘은수(恩讐)’란 은혜와 원한, ‘지호(指呼)’는 ‘손짓으로 부르는 가까운 거리’를 뜻함 : 1965년 한일 수교 후 처음 맞는 새해라는 시기를 감안해 기획한 지면이었음 여기는 / 아세아 노대륙(老大陸) 동녘 / 조용한 아침 나라, 적은 반도를 부각하여 저 이오니아 바다보다 푸르고 고운 동해의 남쪽 물목 / 오늘도 눈을 들어 바라보노니 창망히 넘실대는 먼 물길 끝 / 운하(雲霞) 아득히 걸려 있고 / 그 아래 지호(指呼)에 하마 잡힐 듯 밀려 있는 한 그리매여 / 그것은 / 나와 부즉불리(不卽不離) 운명을 차지한 자리 이 날로 나의 은수(恩讐)의 어귀에만 있어 / 이 물길을 통하여 내 / 슬기와 정의(情誼)를 보냈고 횡악의 갚음을 받음으로 써 / 어젯날까지만도 / 그 얼마나 모진 곤욕의 핏자국을 입었음이랴 (하략) - 유치환은 조선일보에 자주 시와 글을 실었음 : 해방 20년을 맞은 1965년 8월 17일 자에 쓴 시론 ‘해방 20년 맞은 한 시인의 자책/ 높은 윤리의 결핍’에서 “인간으로서의 높고 가열한 윤리의 부족”을 질타했음 - 1956년엔 8월 31일부터 9월 5일까지 ‘울릉도 시초(詩抄)’ 연작시를 실었음 : 마지막 5회째 시 제목은 ‘독도여’였음 : 1954년 11월 우리 독도의용수비대가 일본 순시선을 격퇴한 ‘독도 대첩’ 이후에도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제안 등 도발을 지속하고 있었음 무슨 저주가 / 이 같은 절해에 너를 있게 하였던가. / 종시 청맹 같은 세월과 풍랑의 허망에 깎이고 찢기어/ 한 포기 푸새도 생명하기 힘겨운 독올(禿兀) 불모한 암석만의 편토 / 다시 갈 곳 없으매 갈매기도 마침내 해골을 바래(曝)는 곳. / 그러나 진정 너의 욕(辱) 됨은 이 유찬(流竄)의 고절(孤絕)에 있음이 아니거니 / 제 모국에서 분노(忿怒)가 오늘처럼 치밀 제는 차라리 너 되어 이 절해(絕海)에 이름 견디고저. - 유치환은 23세 때인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했음 : 1933년 조선일보엔 그의 시가 잇달아 실렸음 : ‘폐리(廢履)’(2월 8일 자), ‘벽’(2월 16일 자), ‘무제’(3월 1일 자), ‘돌’(10월 24일 자) 등임 : 1940년 낸 첫 시집 ‘청마시초’도 주목을 받았음 : 이육사의 동생으로 문학평론가이자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인 이원조가 서평을 썼음 - 1940년 8월 평론가 최재서는 유치환을 1세대, 2세대 시인을 잇는 신세대 시인으로 분류했음 : 최재서는 1세대 시인으로 안서(김억), 파인(김동환), 월탄(박종화), 주요한을 꼽았음 : 2세대는 정지용, 임화, 김기림, 김구섭, 김상용, 김태오, 김동명, 백석, 모윤숙, 신석정이었음 : 3세대인 신세대는 유치환, 이찬, 김광균, 윤곤강, 장만영, 임학수, 노천명, 서정주, 이용악, 오장환이었음 : 최재서는 “유치환의 철학적인 시는 ‘페단틱’(*현학적인) 하다고 해서 일시는 조소를 받더니 요새 같아서는 ‘메타피지칼’(*형이상학적) 시인으로서 성공할 소질이 충분한 것을 보여주었고…”(1940년 8월 5일 자 4면)라고 평했음 - ‘신세대’였던 유치환은 1954년 첫 예술원 회원, 1957년 발족한 한국시인협회 대표 간사와 회장, 1962년 예술원 공로상을 받는 ‘원로’로 성장했음 : 1964년 열한 번째 시집 ‘미루나무와 남풍’을 냈을 때 후배 시인 신동문은 유치환에 대해 “이순(耳順)이 되고도 미루나무를 보고 ‘너울너울 하늘로 용트림하고 오르는 사랑의 불기둥’이라고 실감할 수 있는 그 밋밋한 시정신이 너무나 부럽고 미덥다”(1964년 12월 15일 자 5면)고 했음 - 부음 기사는 유치환 시의 한 이미지(정확한 구절과는 다르다)를 마지막 문장으로 썼음 : “비보가 들려온 14일 그를 아끼던 동료 문인들은 청마의 ‘작약꽃 이울 무렵’의 한 귀절을 외며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꽃은 피고 지고 어느 왕국이 무너진들 이보다 아플소냐’고-.”(1967년 2월 15일자 3면) ○ 링크 - 1956년조선일보에시독도여실은청마유치환교통사고로하늘에[조선일보, 2026.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