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건축가 김원의 세상 이야기 ⑦... 어원으로 본 독도[연합뉴스, 2024.08.09.]

  • 등록: 2024.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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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VIBE] 건축가 김원의 세상 이야기 ⑦... 어원으로 본 독도
[연합뉴스, 2024년 8월 9일]

○ 독도는 어원으로 봐도 우리 땅이라는 주장에 동참하고 싶음

- 독도라는 이름의 유래를 말의 관점에서 접근해 보는 것은 다른 어떤 역사적 증거물보다 확실할 수 있음

- 독도라는 이름은 본래 이 섬의 이름이 아니었다고 들었음
: 조선 성종 때는 삼봉도(三峰島)라 했고, 정조 때는 가지도(可支島)라고 했음
: 19세기 말 이후에는 석도(石島) 또는 독도(獨島)라고 불렸음
: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독섬'이라고 한다는데, 그것은 석도(石島, 돌섬)라는 뜻이라고 함
: 조선 말기에 울릉도를 개발하는 사업이 진행되면서 전라도 사람들을 많이 이주시켰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라도 사투리의 '독'이 '돌'(石)의 의미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음
: 경상ㆍ전라지방에서 '돌'을 '독'이라고 하며, 제주지방에서 병아리('닥새끼'로 칭함)를 '독새끼'라고 하듯이 '독'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닥'이 됐다가, 받침을 발음 못하는 일본인들이 다시 '독 - 도꾸 - 더깨 - 다께'로 바꾸어 불렀으며, '섬'이 '서미 - 시미 - 시마'로 변했다는 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봄
: 잘 알려져 있듯이 '곰'(熊)을 일본인들이 '고마(쿠마)'라고 하는 것과 같음

- 실제로 1900년에 대한제국 황제 칙령으로 독도를 울릉군에 편입시킬 때 서류상으로 '석'(石島, 돌섬)라고 적고 있음을 봤음
: '다께시마'는 '돌섬'이라는 뜻의 일본식 한국말이라 할 수 있음
: '돌섬'이라는 뜻으로 '다께시마'란 말은 독도를 가장 잘 묘사하고 있지만, 일본말 '다케시마'(竹島)가 독도를 묘사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임
: 그것은 정말 '돌섬'이지 '대나무 섬'은 아니기 때문임

- 필자는 평소 왜 일본인이 거기다 대나무(竹 ; 다케)를 갖다 붙였을까 궁금했음
: '다케'가 우리말 '독'의 와음(訛音)이라는 설에 무릎을 쳤음

- 다른 한 가지 독도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는 야생식물학자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음
: 예컨대 백두대간에서 자라는 '날개하늘나리'라는 나리꽃이 독도에 피는데 그것은 일본에는 없는 종류라는 것임
: '섬괴불나무'는 1900년대 초에 우리나라 식물을 조사해 계통을 세우고 1천여 종의 이름을 붙인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1882~1952)에 의하면 한국의 울릉도에서만 자라는 '한국특산관목'이라는 것이고, 울릉도 해안에 자라는 십자화과의 '섬장대'와 '토종민들레'도 독도에서 자란다고 함

- 야생화를 비롯한 식생분포를 연구, 분석해 보면 이곳이 우리 땅이라는 것이 분명함
: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임
: 식물들은 씨앗과 포자상태로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자신이 생장하기 적당한 땅에 내려앉아 정착을 하기 때문임

- 경북대 하지홍 교수가 독도에 삽살개를 데려가 지신(地神)밟기를 한다는 이야기도 재미있고 그럴듯했음
: 삽살개는 털이 길어서 이마의 털이 눈을 덮어 자람
: 삽살개는 습관이 돼 눈을 내리덮은 털 사이로 밖을 내다보는 것이 이력이 나고 불편하지도 않은 모양이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아주 답답해 보임
: 어떨 땐 털에 가려 눈이 안보여서 귀신같이 허연 윤곽선만으로 보임
: 아마도 그래서 삽살개가 액운을 쫓아내는 영험함이 있다고 믿는 것 아닌가 함

- 우리 집에 있던 삽살개도 하 교수가 번식시켜 분양해 준 순종 암놈임
: 이름은 '앵두'라고 예쁘게 지어줬지만, 어떤 때 밤에 비라도 오는 날이면 정말로 귀신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여서 깜짝 놀라곤 했음
: 제발 하 교수의 삽살개들이 독도의 지신들을 영험하게 밟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임
: 일본인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며 저들의 아키다견(秋田犬)과 닮은 진돗개를 띄우는 대신, 우리의 대표견인 삽살개를 원천적으로 몰살하려 했던 쓰라린 역사를 이겨내고 다시 살아난 삽살개라서 녀석들의 지신밟기는 더욱 뜻깊은 일이었음

- 지질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독도 주변 바다 밑 200~300 미터 깊이에는 세 개의 해산(海山, 바닷속의 산)이 있는데 그중 하나의 산에서 화산이 터져 올라온 것이 독도라는 것임
: 그 세 개 산이 울릉도를 포함하는 울릉분지를 만들고 있다는데 우리가 늘 이야기하던 대로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는 지리학적 증거가 된다는 것임

- 지금까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증거가 될 만한 전적, 지도 등 서류들이 많이 발견됐지만, 특이한 것 하나를 소개함
: 18-19세기 중국에서 활동하던 가톨릭 선교사 대부분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알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지도가 또 하나 있음
: 예수회의 뒤 알데(Jean Baptiste Du Alde, 1674-1743) 신부가 1735년에 펴낸 '중국통사'라는 책에 프랑스의 지도학자 당빌(D'Anville)이 그해에 그린 '조선왕국전도'가 있는데 이 지도에는 독도는 물론이고 간도까지 조선의 영토로 그려져 있음

-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도 136년 전에 그려진 조선전도
: 서양인이 그린 최초의 한국 전체 지도로서 당시 중국에 와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과 청나라 각지를 답사하고 측량해 그린 것임
: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서양 선교사들의 이같은 인식은 이후 교회지도 제작에 그대로 이어져,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도 1846년에 외국 선교사들을 위해 조선전도를 직접 만들면서 울릉도 동쪽에 독도를 그리고 '于山'이라고 표기했음

- 김대건 신부는 1845년 4월 7일자로 스승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친필 서한에서 그해 조선전도를 제작했다고 밝혔음
: 당시 부제였던 김 신부는 몰래 귀국해 선교사의 안전한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이 지도를 제작했음
: 김대건 신부는 지도에 불필요한 산이나 강 이름 등을 빼고 전국의 주요 관부와 병영 266곳, 만주 봉황성에서 의주까지 들어오는 도로, 남해안 해로 등을 수록했음

-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는 우리나라 지명을 발음 그대로 로마자로 표기한 최초의 지도임
: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 이전에 서양에 알려진 우리나라 지도는 프랑스 왕실지리학자 당빌이 제작한 '조선국도'와 독일인 시볼트가 제작한 '조선반도도'가 전부였음
: 당빌의 조선국도는 북경 주재 프랑스 예수회원들이 10여 년간 수집한 중국과 조선측의 자료를 근거로 제작해 조선 지명이 모두 중국 발음으로 표기돼 있음
: 시볼트의 조선반도는 일본원도에 의거해 그린 지도였음
: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는 서양에 우리 지명을 소개한 첫 지도임

- 1855년 프랑스에서 간행된 지리학사전,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에 대해
: "김대건은 분명히 당빌과 시볼트가 사용한 것과는 다른 지도나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 그의 지도를 작성했다. 과학적 여건이 명백히 결여돼 있음에도 거기에는 우리가 항상 참고해야 할 많은 정보가 있다. 그것은 예수회 수사들이 천문학적 원리에 의해 수정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중국인들이 작성한 지방지도와 상이한 것이다. 달레가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한 지도는 김대건의 지도와 결부시켜야 할 것이다"고 평가했음

-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는 중국 변문에서 최양업 신부(당시 부제)와 함께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매스트르 신부에게 전달되었음
: 매스트르 신부는 중국 상하이에서 자신들을 도와주던 프랑스 총영사 몽티니에게 이 지도를 건넸음
: 몽티니는 프랑스로 귀국해 이 지도를 왕립도서관에 기증했고 오늘날까지 파리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음

- 김대건 신부는 자신의 조선전도에 대부분의 산과 강 이름을 삭제했음에도 울릉도와 독도를 기재해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했음
: 김대건 신부는 조선전도에 울릉도 동쪽에 독도를 그리고 로마자로 'Ousan'이라고 뚜렷하게 표기했음

- 독도는 조선 후기인 1881년(고종 18년)부터 '독도'로 불렸으며 이전에는 삼봉도(三峰島)ㆍ우산도(于山島)ㆍ가지도(可支島) 등으로 불렸음
: 리델 주교는 1869년 '한중일 지도'를 제작하면서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참고해 독도를 명기했음
: 달레 신부 역시 1874년 김대건 신부 조선전도를 보완해 제작한 자신의 '조선지도'에 독도를 조선 땅으로 표기했음

- '일본은 에도 막부 초기인 17세기 중엽에 다케시마 영유권을 확립했다'고 일본 외무성이 주장했음
: 나이토 세이추 시마네현립 대 명예교수는, 에도 막부는 오히려 1696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확인해 일본 어부들의 출어를 금지했다고 반박했다.
: 메이지 정부의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이 독도와 울릉도가 일본 영토인지 조사한 뒤, 1877년 3월 '독도와 울릉도는 일본 영토와 관계없으니 조심하라'고 내무성과 시마네현에 지시한 공문서인 태정관 지령문을 근거로 일본 주장을 부인했다.
: 그는 1905년 일본 정부의 독도 편입 및 영유 의사 재확인 주장도 고유 영토론과 모순되는 내용이라고 강조했음

- 일본 정부
: "1904년 9월 시마네현 니카이 요자부로가 강치잡이를 위해 내무· 외무·농상무 대신에게 리앙코섬(독도)의 영토 편입 및 10년간 임대를 청원했다"는 내용을 적시하며 독도 영유의사 재확인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음

- 나이토 교수
: "당시 야마자 엔지로 외무성 정무국장, 마키 보쿠신 농상무성 수산국장, 기모쓰게 가네유키 해군성 수로부장 등 세 명이 중심이 돼 강치잡이를 하기 위해 조선 쪽에 대하원(독도 이용청원)을 하려던 니카이를 유인해서 그의 대하원 신청을 독도 '영토 편입 및 대하원'으로 바꿔 일본 정부에 내도록 했다"고 강조했음
: 러-일 전쟁으로 동해를 지나는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는 망루를 설치하기 위해 독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가 '공작'을 벌였다는 것임

- 이들 3명 중 마키와 야마자는 각각 '한해통어지침'(韓海通漁指針ㆍ1903년), '최신한국실업지침'(最新韓國實業指針ㆍ1904년)이라는 일본인을 위한 한국 가이드북의 서문을 썼음
: 그 가운데 '조선 강원도에 속하는 울릉도와 그 부속 리앙쿠르(독도)'라는 서술이 나온다고 나이토 교수는 지적했음

- 1900년 대한제국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위해 칙령 41호에서 제기한 석도(石島)가 독도임을 지칭하는 1905년 이전 기록을 찾아내는 게 관건이라는 것임
: 한국 학자들은 석도가 한국 방언으로 돌(石)을 '독'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이를 발음대로 한자로 고치면 독도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부인하고 있음

○ 링크 - 건축가김원의세상이야기어원으로본독도[연합뉴스, 2024.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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